중세 엘람 왕국
제2천년기 후반의 근동 세계의 동쪽 국경에서 엘람(Elam)이라는 나라가 힘센 이웃 국가들과 나란히 발전하였다. 18세기 바빌론의 함무라비에 패배한 엘람 지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1500년부터 수사의 왕들은 자신을 아카드어로 ‘수사와 안샨의 왕들’로, 엘람어로는 ‘안샨과 수사의 왕들’로 불렀다. 1400년 이후 서쪽에 위치한 수시아나의 저지대는 남동 약 500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파르스(Fars) 지방에 해당하는 안샨의 고지대와 또한 남쪽 400km 지점에 있는 페르시아 만 해안 지역과 통일되었다. 1400년 이후에는 엘람어가 공식어가 되었다. 이 시대의 초반에는 수사에서 엘람신들이 숭배되기도 했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이 더욱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1400년 이후에는 엘람의 신들이 공식 종교를 지배하게 된다.
이 왕들의 절대 연대를 비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와 비교해야 한다. 바빌론의 사료들은 종종 엘람과의 군사적 충돌을 언급한다.
[키디누에스 왕조, Kidinuid dynasty]
- 키디누(Kidinu)
- 인슈쉬낙-순키르-납피르(Inshushinak-Sunkir-Nappipir)
- 탄-루후라테르 2세(Tan-Ruhuratir II)
- 샬라(Shalla)
- 텝티-아하르(Tepti-Ahar)
1500년과 1100년 사이에 엘람은 세 왕조가 이어 다스렸다. 우리는 약 1400년에 다스린 첫 번째 왕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섯 명의 왕 이름이 고작이다. 그들 대부분은 ‘수사와 안샨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그 왕들 중 하나인 테프티-아하르(Tepti-ahar)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수사에서 약 20km 지점에 새로운 도시인 카브낙(오늘날의 하프트 테페)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기할케스 왕조, Igehalkid dynasty]
- 아타-할키(Ata-Halki)
- 아타르-키타 1세(Attar-Kittah I)
- 이기-할키(Ige-Halki)
- 파히르-이쉬샨 1세(Pahir-Ishshan I)
- 키딘-후트란 1세(Kidin-Hutran I)
- 아타르-키타 2세(Attar-Kittah II)
- 훔반-우메나 1세(Humban-Numena I)
- 운타쉬-나피리샤(Untash-Napirisha or Untash-Humban)
- 키딘-후트란 2세(Kidin-Hutran II)
- 나피리샤-운타쉬(Napirisha-Untash or Humban-Untash)
- 파히르-이쉬샨 2세(Pahir-Ishshan II)
- 운파타르-나피리샤(Unpatar-Napirisha or Unpatar-Humban)
- 키딘-후트란 3세(Kidin-Hutran III)
중세 엘람국의 형성은 그 시대의 두 번째 왕조의 업적이었다. 두 번째 왕조의 창시자는 이기-할키(Igi-halki)였다. 두 번째 왕조는 약 200년간 지배했다. 첫 번째 계승자인 파히르-이스샨(Pahir-ishshan)을 그의 형제인 아타르-키타(Attar-kittah)가 이어받았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또 왕위를 이었다. 그 다음에 왕위는 파히르-이스샨의 두 아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은 이타르-키타의 후손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가문의 두 계파 간의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벌어진 건축 사업은 페르시아 만의 항구인 리얀에서의 건축활동을 포함한다. 가장 큰 사업은 14세기 말에 수사에서 40km 떨어진 지점에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었다. 신도시는 그 도시를 건설한 사람인 운타스-나피리샤(Untash-Napirisha)의 이름을 따라 알-운타스-나피리샤로 지었다. 그 도시의 중앙에는 수많은 성전을 가진 안뜰로 둘러싸인 거대한 지구라트가 있었다. 지구라트는 나피리샤라는 엘람의 최고신과 수사의 수호신인 인슈쉬낙에게 봉헌되었다. 건설은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수백만 개의 벽돌이 건축에 들어갔으며 사용된 연료의 양도 엄청났다. 건축이 견고하게 잘 되어 이 지구라트는 근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움직임은 국가의 문서에 쓰인 공식 언어로 엘람어가 채택된 것이다.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건축 비문들은 더는 아카드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알-운타스-나피리샤는 당시의 많은 건축물처럼 창시자가 죽자 그 중요성이 소멸하였다.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은 바빌로니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다.바빌로니아가 꼭두각시 왕들을 임명한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의 영향 하에 있었을 때인 키딘-후트란 3세는 티그리스강 동쪽을 침공하였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두 번 침공했다. 첫 번째 원정에서는 닙푸르를 점령하였고 두 번째 원정에서는 이신을 공격하였다. 카시트인들이 투쿨티-니누르타가 1207년에 죽자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을 회복하였을 때 키딘-후트란도 죽고 엘람에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슈트루케스 왕조, Shutrukid dynasty]
- 할루투쉬-이슈쉬낙(Hallutush-Inshushinak)
- 슈트룩-나흐훈테 1세(Shutruk-Nahhunte I)
- 쿠티르-나흐훈테 2세(Kutir-Nahhunte II)
- 쉴학-인슈쉬낙 1세(Shilhak-Inshushinak I)
- 후텔루투쉬-인슈쉬낙(Hutelutush-Inshushinak)
- 훔반-누메나 2세(Humban-Numena II)
- 슈트룩-나흐훈테 2세(Shutruk-Nahhunte II)
- 슈투르-나흐훈테 1세(Shutur-Nahhunte I)
-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Mar-biti-apla-usur)
- 아크쉬르-쉬무트(Akshir-Shimut)
- 아크쉬르-나흐훈테(Akshir-Nahhunte)
- 카라-인다쉬(Kara-Indash)
12세기 초의 수사에 있던 건축 비문은 슈트룩-나훈테라는 인물의 활동을 보고한다. 그는 할루투스-인슈쉬낙의 아들로 사료에 따르면 그의 후손들이 12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엘람을 다스렸다. 슈트룩-나훈테는 카시트 왕 멜리-쉬팍(재위 1186~1172)의 장녀와 결혼했으나 당시 바빌로니아와의 관계는 매우 안좋았다. 그것은 아마 엘람인들이 그가 바빌로니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슈트룩-나훈테가 1155년경에 바빌로니아를 침략했고 카시트의 마지막 왕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주요 도시들에서 수많은 양의 전리품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수사의 왕은 알-운타스-나피리샤와 같은 엘람의 도시들에서 그 유물들을 수사에서 가져와 다시 봉헌하였던 것이다. 슈트룩-나훈테는 왕권을 그의 아들인 쿠티르-나훈테에게 넘겨주었다. 조금 후대의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쿠티르-나훈테는 바빌로니아를 노략질하고 마르둑의 신상을 훔쳤다.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실학-인슈쉬낙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를 반복적으로 침공하고 티그리스 동쪽 지역과 북으로는 누지까지 다스렸다고 주장하였다. 카시트 왕조가 몰락하고 아시리아가 쇠퇴하면서 그 지역은 엘람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1세 아래서 바빌로니아가 부흥하자 엘람의 번영은 끝나게되었다. 그 바빌로니아의 왕은 마르둑의 신상을 수사에서 다시 가져왔고 그 후 엘람은 우리의 역사 기록에서 300년 동안 사라졌다.
엘람은 근동의 역사에 비교적 늦게 등장한 나라로 그것의 국제적 영향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지역에 국한되었다. 엘람은 바빌로니아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저항하기도 했다. 엘람의 이런 혼합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저지대도 엘람의 고원지대도 문화적 패권을 갖지 못한 엘람의 문화의 다양성의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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