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킨타이어 [John Macintyre, 1837~1905]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7.18.~1905.9.1.)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목사. 성경번역자. 마근태(馬勤泰)ㆍ마흠태(馬欽太)
【1837년】
- 1837년 7월 18일 스코틀랜드 렌프루셔의 페이즐리에서 염직업자인 윌리엄 매킨타이어와 엘리자베스 글렌(Elizabeth Glen) 사이에서 출생했다.
【1857년】
- 글라스고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57년 에든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회신학교에 입학한 후 졸업하였다.
【1865년】
- 1865년 6월 1일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글라스고의 배이리스톤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872년】
-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의 북중국선교사로 1872년 1월 1일에 산동성의 개항장인 지푸에 도착하였으며, 산동성의 내륙인 웨이히엔(현 濰坊)을 개척하는 등 내륙지방에서 순회전도 사역을 담당하였다.
【1876년】
- 교단 해외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1876년 초까지는 만주의 개항장인 뉴치왕(牛莊)으로 건너가 이미 1872년 말에 와서 만주선교를 하고 있던 존 로스(John Ross)와 함께 사역하기 시작했다. 사역 초기에는 뉴치왕, 해쳉, 다핑샨, 묵덴 등지에서 순회전도를 하거나 채플을 설치하여 대중에게 기독교를 전하였다.
- 1876년에 로스의 여동생 캐서린 로스(Catherine Sutherland Ross)와 뉴치왕에서 결혼하였다.
【1878년】
- 중국 주재 선교사들이 펴내던 학술지 The China Review에 1878년부터 1879년까지 6회에 걸쳐 “禮記로부터의 메모(Jottings from the Book of Rites 禮記)”를 연재하였다.
【1879년】
- 뉴치왕의 만주선교부에 한국인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1879년에 백홍준과 이응찬을 포함하는 3명의 한국인에게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베풀었고, 연말 또는 늦어도 1880년 초까지는 또 다른 1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국인 구도자들을 위하여 주로 저녁 시간에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가르쳤는데 그 숫자는 대략 1880년에 연인원 30명을 상회했다.
- 선별된 한국인들을 어학교사 및 성경번역자로 삼아 중국어 신약성경 전체를 한글로 초벌 번역하였고 공관복음서 및 사도행전까지는 그리스어 성경을 대조하여 수정했다. 성경번역과는 별도로 일부 한국인을 복음전도자로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1880년】
- 1880년대부터는 항구도시 뉴치왕을 관장함과 동시에 동북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해쳉(海城)에 정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주변에 스테이션들을 개척하였다. 또한 동쪽의 봉황성에 이르는 압록강 북쪽의 지역들에서도 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그의 사역에는 대체로 전도부인 양성 및 일반교육을 목표로 하는 여학교와 같은 교육사업이 병행되었다.
- 1880년에 기독교 서적 및 과학서적을 편지와 함께 의주의 백홍준에게 인편으로 보내다가 한국인 관리에게 발각됨으로 백홍준이 투옥되었으나 수개월 후 석방되어 뉴치왕에서 재회하였다.
【1885년】
- 1885년 3월 중순부터 약 한 달간 묵덴의 의료선교사 두걸드 크리스티와 함께 해쳉에서 봉황성까지 다니며 의료 및 전도순회 사역을 하였는데, 자신의 주장으로 봉황성에 거주하는 구씨라는 한국인 신자의 집에서 가족과 이웃들을 위하여 진료하고 복음 사역을 펼쳤다.
- The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인간성에 대한 맹자의 사상(Mencius on Human Nature)”을 2회 연재하였다.
【1904년】
- 1904년 전반기의 4-5개월 동안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의 남서쪽에 위치한 파오팅푸(현 保定) 선교부에서 다양한 기독교 사역을 펼쳤다.
【1905년】
- 1905년 6월 4일에 주 사역지였던 해쳉에서 중국인 신자들과 함께 마지막 교회를 설립했는데, 지역의 최고위 관리들로부터 복음전파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족자 한쌍을 선물로 받았다.
- 1905년에 건강을 잃어 뉴치왕의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권고에 따라 하북성의 페이타이호(北載河)로 요양 갔다가 열차여행의 피로를 견디지 못한 채 9월 1일에 별세하였다. 유해는 열차로 이송되어 뉴치왕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해쳉의 교회 안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교회는 그해 10월 시내에 채플을 신축하고 매킨타이어기념채플(Macintyre Memorial Street Chapel)로 명명하였다.
- 부인 캐서린 로스는 그 후에도 해쳉과 랴오양(遼陽) 등지에서 사역하다가 1926년에 해쳉에서 별세하였다. 자녀로는 윌리엄 로스, 캐서린 서더랜드, 엘리자베스 글렌, 휴 로스, 마리온 이사벨, 그리고 릴리안 스미스가 있으며 모두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엘리자베스와 릴리안은 부모가 소속되었던 스코틀랜드연합자유교회의 만주선교사로 활동했다. 휴는 의사가 되어 영국에서 일했다. 역시 의사가 된 마리온은 아일랜드장로교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로서 만주에서 활동했다.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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