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3일 토요일

송인서 [宋麟瑞, 1867~?] 장로교 목사, 장로교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1인.

송인서 [宋麟瑞, 1867~?]

장로교 목사, 장로교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1.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1867
  •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다.
 
1891
  • 한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나 1891S. A.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와 그의 조사 한석진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92
  • 평남 평원군의 한천교회를 설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천교회 설립을 1893년으로 보고 있다]
 
1893
  • 마펫 선교사를 도와 황해도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재령군의 신환포교회(新煥浦敎會)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894
  • 47일에 일어난 평양 감사 민병석의 개신교인에 대한 불법박해로 체포되었다. 이때 동료 한석진 조사, 감리교 전도인 김창식 등과 함께 평양 감영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으로 끌려갔다(당시에 송인서와 최치량은 매질을 당한 후 보석으로 풀려났고, 한석진과 김창식은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감리교 선교사 홀(W. J. Hall)의 주선으로 조정에 알려지고 고종 황제의 특명에 의해 이들의 사형집행이 가까스로 중지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 평원군 명당동교회(明堂洞敎會)와 용강군 본리교회(竹本里敎會)를 설립하였다.
 
1895
  • 마펫 선교사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조사가 되었다.
 
1896
  • 주천교회를 설립하였다.
 
1898
  • 강동군 설파교회와 강동군 대원교회를 설립하고 시무하였다.
 
1901
  • 장로교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리스도신문에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1901921일 장로교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오고간 것을 볼 수 있다.
  • 평양 장로 방기창이 "교우들에게 연보전을 십일조로 수용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자 회중들이 적극 찬성하여 각기 소원대로 수용하자고 했다. 이때에 송인서가 회중을 향하여 "금년 같은 흉년을 당하여 우리 교중에 빈한한 형제를 어떻게 구제하겠느냐?"고 하자 회중들이 다시 의논해 전국 교회에 통첩하여 각각 그 교회마다 구차한 교우들을 살펴 서로 구제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 정형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에서 탈피해 무조건적인 헌금 수용이 아니라 때에 따라 교우들의 민생을 먼저 살펴볼 것을 인지한 송인서의 탄력적인 섬김의 목회지도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출처 : 한국기독공보]
 
1902
  • 마펫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190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입학하였다.
  • 신학수업 중에는 평원의 한천교회에서 교역에 임하였다.
 
1907
  • 1907년 초에 한천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 630, 길선주ㆍ양전백ㆍ이기풍ㆍ방기창ㆍ서경조ㆍ한석진과 함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1).
  • 그의 졸업에 즈음하여 마펫 선교사가 그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송인서는 1895년 내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94년 민병석 감사의 박해사건에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는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나왔으나 조금도 변함없이 널다리골교회에 출석하였다. 그의 인격과 신앙이 타에 모범이 되므로 1902년에 신학생으로 추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영예로운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수년간 평양 서부지역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는데 앞으로도 그 지역의 지도자 및 전도인의 사명을 갖고 일하게 될 것이다.” [마포삼열박사전기, 234-235]
  • 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개회기도를 맡아 하였고 초대 임원으로 선출되어 부시기의 보직을 맡아 수행하였다.
  • 917, 장로교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2
  • 각 노회가 성립된 이후에는 평남노회 소속 목사로 평남 서부지역의 전도와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1914
  • 황해노회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1916
  • 1916년까지 평남 진남포시에 거주하며 진남포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 그러나 1916년 신병으로 인하여 잠시 휴직하였다.
 
1921
  • 복직하였다.
 
1922
  • 평남노회의 분립시에는 평서노회로 속하여 역시 평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하였다.
  • 평서노회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6
  • 건강상 이유로 다시 휴직하였다.
 
1929
  • 1929년 이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 그는 스페인 출신의 판토하가 저술한 칠극’(七克)을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칠극보감七克寶鑑을 발간했다. ‘칠극보감을 통해 조선의 지식층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에게 기독교 신앙을 통한 도덕적 개선을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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