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홍봉주 [洪鳳周, 1814~1866] 병인박해 때 순교.

홍봉주 [洪鳳周, 1814~1866]

병인박해 때 순교. 세례명은 토마스. 본은 풍산(風山).
 
1814
  •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홍재영이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심 바르바라와 혼인을 하였다.
  •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혹은 바오로)의 손자이며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의 아들. 어머니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이다.
 
1839
  •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부친과 부인(심 바르바라)은 순교하였지만 홍봉주는 석방되었으며, 이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였다.
 
1853
  • 최책감을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최양업 신부를 만나 회개하였다.
 
1855
  • 1855년 초(2) 그는 메스트르 신부의 명에 따라 베르뇌 주교를 입국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18553월 서울을 떠난 홍봉주는 4월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1856
  • 18561월 조선교구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전동에 있는 이군심의 집으로 인도한 뒤 예산 본가로 내려갔다.
 
1861
  • 1861년 재혼한 처자가 죽자 3()에 상경하여 주교와 함께 살며 주교의 일을 도왔고, 5()에는 주교의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으로 이전하였다.
 
1865
  • 1864년부터 러시아가 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홍봉주는 방아책(防俄策 :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8658() 남종삼을 방문하여 의논하였다. 그러나 남종삼의 소극적인 태도로 그만두었다.
 
1866
  • 18659() 또다시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해오자, 186512월 하순에서 18661월 초순 사이에 다시 김계호ㆍ이유일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즉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ㆍ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이를 위해 조선에 와 있는 서양의 천주교 신부들과 주교들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반응은 미온적이었고, 이에 남종삼을 통해 다시 한번 방아책을 올린 결과 대원군은 주교들과 면담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약속과는 달리 주교들과의 면담을 미루다가 박해를 일으켰고, 이에 홍봉주는 1866223(음력 19)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37(음력 19)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