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앵베르 [Imbert, Laurant-Joseph-Marius, 1796~1839] 제2대 조선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선교사

앵베르 [Imbert, Laurant-Joseph-Marius, 1796~1839]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앵베르(Laurant-Joseph-Marius Imbert, 1796~1839). 성인. 2대 조선 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축일은 920.
 

1796
  • 17963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앵베르는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며, 얼마 뒤에는 카브리에 본당의 아르노(Arnaud) 신부와 생활하게 되었다.
 
1807
  •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교에 들어갔다.
 
1812
  • 1812년 앵베르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학 공부를 마쳤을 때에도 나이가 어려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2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는 등 시간을 보냈다.
 
1818
  • 1818108일 에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원장에 의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보내졌다.
 
1819
  • 1819년 앵베르는 그곳(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이듬해 327일에 차부제품을 받고, 이어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해 12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820
  • 1820,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된 앵베르 신부는 320일 파리를 떠나 페낭으로 향했다.
 
1821
  • 1821319일 페낭에 도착하였다. 그는 페낭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1822
  • 1822210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이어 코친차이나로 가서 5-6개월 동안 머물렀고, 다시 통킹으로 가 2년 이상 머물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1825
  • 18253월에 중국의 운남성을 거쳐 목적지인 사천에 도착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활동하는 가운데, 티벳 국경의 모팽(Moping)에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31
  • 18319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1833
  • 1833년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에 조선 선교에 대한 뜻을 여러 번 전달하였으나, 그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1020일 사망하였다.
 
1836
  • 1836426일 포교성성에서는 앵베르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와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1837
  • 18374월 초에 교황청의 칙서를 받았고, 같은 무렵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앵베르 주교는 갑사 주교의 명의로 5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Fontana) 주교에 의해 성성됨으로써, 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 성성식을 마친 앵베르 주교는 816일 사천을 떠나 10월말경 달단의 서만자에 도착하였고, 다시 북경ㆍ산해관을 경유해 124일 봉천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앵베르 주교는 1216일 봉황성의 변문에서 정하상, 조신철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12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가 되었으며, 조선 교회는 창설 53년 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1838
  • 1838년 입국 후 서울 후동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운 앵베르 주교는 3개월 후에는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터는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 그는 서울과 경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6년 초 6,000명이던 신자수는 1838년 말 9,000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 그는 한국어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4명의 통역들을 데리고 기도문 번역에 착수하여 1838년경 텬주 셩교 공과텬주 성교 십이단을 완성하였다.
  • 또 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玫瑰會)ㆍ성의회(聖衣會) 등 신심 단체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를 주는, 일종의 성영회(聖嬰會) 활동도 전개하였다.
  • 이와 함께 정하상ㆍ이재의(李在誼, 토마스) 등 네 사람을 신학생으로 뽑아 하루에 두 시간씩 라틴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그중 두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침으로써 3년 안에 신품을 줄 계획도 갖고 있었다.
  • 이외에 그는 일본의 류큐 섬을 돌보기 위해 사천에서 데려온 회장을 보내려고 시도하였고, 박해의 조짐이 보이던 1838년 말부터는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기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일기는 후에 기해일기로 완성되었다.
 
1839
  • 한편 1838년 말부터 서서히 나타난 박해는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25일 갓등이 공소에서 동소문 밖 신자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130일 상경하여 박해가 확대되기 전에 서둘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418일에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을 반포하였고, 524일에는 남명혁과 이광헌 등 9명이 공식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앵베르 주교는 63일 손경서ㆍ정화경이 마련한 수원 근처의 상귀(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로 피신하였다.
  •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무렵 배교자 김순성(金順性, 요한, 일명 여상)은 정화경을 유인해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아냈으며, 주교는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811일 자수하였다. 다음날 서울로 압송된 앵베르 주교는 처음 좌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으며, 이어 의금부로 넘겨져 문초를 당하였다. 의금부에서 4차례의 심문을 받은 앵베르 주교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1839921일 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사후
  •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 일 후에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姑山,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三聖山,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7-1)으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1021일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그해 112일 종현(현 명동)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 1857924일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75일 시복되었으며, 198456일에 시성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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