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남종삼 [南鍾三, 1817~1866] 병인박해 때 순교,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의 한 사람.

남종삼 [南鍾三, 1817~1866]

병인박해 때 순교.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의 한 사람. 축일은 920.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1817
  •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 1817(순조 17)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백부인 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 호는 雨村)의 양자로 들어갔다.
  •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남규로(南奎老)이며,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남이우(南履佑)이고, 부친 상교(尙敎)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어머니는 이세관(李世瓘)의 딸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부인은 신행권(申行權)의 딸 고령 신씨(高靈申氏)와 이석회(李錫會)의 딸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1838
  • 22세 때인 1838(헌종 4)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영해 현감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承旨)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 남종삼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온 사실에서 볼 때 그의 양자로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61
  • 1861년에 입국한 리델 신부에게 조선 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ㆍ다블뤼 주교 등과 교유하면서 교회에 일에 참여하였다.
 
1865
  • 러시아가 북경조약(1860) 이후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프랑스의 힘을 끌어들이도록 하면 러시아를 저지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1865년 말에 홍봉주ㆍ이유일ㆍ김면호 등이 이이제이의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으나 대원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남종삼이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하고 대원군에게 다시 방아책을 건의하게 된 것은 186511월 말()이었다. 이때 그는 궁중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직접 상소문을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올리는 한편,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회동도 건의하였다. 이번에는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선교사들을 만나 방아책을 논의해 보겠다는 결심을 표시하였고, 이에 남종삼은 홍봉주ㆍ이유일 등과 함께 이 소식을 베르뇌와 다블뤼 주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교들과 대원군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교들이 비밀리에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으므로 거처를 알기 어려웠고, 지방으로 주교들을 만나러 갈 여행 비용을 마련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866
  •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남종삼 일행에게 비용을 대준 사람은 대원군의 사돈(대원군 딸의 시아버지) 조기진이었다. 이때 베르뇌 주교에게는 김면호가, 다블뤼 주교에게는 이유일이 소식을 전하였으며, 이에 다블뤼 주교는 1866125(129), 베르뇌 주교는 129일에 상경하였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대원군의 마음은 이미 바뀌어져 있었다. 남종삼이 주교들의 도착 사실을 알리러 가자 그는 오히려 냉대를 하면서 남종삼에게 낙향을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 대원군의 마음이 변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조속한 회동을 기다리던 대원군의 마음에 초조감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이 일어나게 되었고, 2) 러시아의 월경 행위가 잠잠해져 위협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3) 자신의 천주교 접근으로 인해 반대파 대신들인 조두순ㆍ정원용ㆍ김병학 등으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은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확산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이 동지사행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면서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정치적 문제를 천주교 박해로 풀어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1866년 정월()을 기해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유명한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 박해가 내려지기 이전에 남종삼은 베르뇌 주교를 방문한 다음, 신앙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제천 땅 묘재(山尺)에 은거해 있는 부친 남상교를 찾아갔다. 여기에서 부친의 격려를 받은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다시 상경하기로 작정한 다음 이웃 배론의 신학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도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종삼은 형세를 관망하기 위해 일시 피신하고자 하였으나, 18663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그리고 여러 선교사들이 투옥되어 있었는데, 남종삼이 체포된 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 국청에서 남종삼은 모두 6회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갔으며, 오히려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그에게 있어 천주교 신앙은 밝히 상제를 섬기는’(昭事上帝) 학문이요, ‘충과 효를 다하는’(忠君孝父) 학문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요, 통외(通外)의 흉악한 계책을 꾸며냈다는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이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서양과의 통교를 건의한 것은 매국의 계책이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과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도록 하는 뜻에서 나온 방책이었다.
  • 남종삼은 모반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37(121)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와 함께 순교하였다.
 
사후
  •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산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지하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 한편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이때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 이소사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였다. 그 중 이소사는 유배지 창녕현에서 훗날 순교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 남종삼은 그 후 1885년에 이르러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고, 196810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의 품에 올랐으며 19845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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