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귀츨라프 [Gützlaff, Karl Friedrich August, 1803-1851] 독일인 선교사. 중국학 학자.

귀츨라프 [Gützlaff, Karl Friedrich August, 1803-1851]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중국명은 곽실렵(郭實獵) 혹은 갑리(甲利). 독일인 선교사. 중국학 학자.
 

1803
  • 180378, 프러시아의 포메라니아(Pomerania) 퓌리츠(Pyritz, 현재의 폴란드 서포모제주피지체)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7
  •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슈체친에서 안장(鞍裝) 견습생이 되었다.
  •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 17세기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18
  • 15세에 아랍어와 튀르키예어를 배웠다.
 
1820
  • 1820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 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했다.
 
1821
  •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의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한다.
 
1823
  • 중국 개척선교사 모리슨(R. Morrison)에게서 감화를 받아 중국선교를 할 것을 결심하고 네덜란드 선교회에 소속되었다.
 
1826
  • 18267월에 안수를 받았다(23).
  • 바타비아(Batavia)에 파송받아 선교활동을 벌였다.
 
1827
  • 1827년 자바와 수마트라를 거쳐 1828년 싱가포르에 머물렀다.
  •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다.

1829
  • 싱가포르가 중국과 거리가 멀어 중국 선교가 여의치 않자 1829년 네덜란드선교회와 인연을 끊고 중국인이 많은 태국 방콕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시암(Siam)어로 성서를 번역하였다.
 
1831
  • 아내 메리 뉴엘(Mary Newell, 1794~1831)2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 1831년 천진(天津)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하여 선교사 모리슨을 만나 절친한 동역자가 되었고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장이며 기독교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린제이(H. H. Lindsay)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 같은 해 61차 전도여행(1831.6.3.~12.13.)을 떠나 만주로부터 금주(錦洲)에 이르는 장거리 전도를 하였다.
 
1832
  • 1832226, 린제이와 함께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인 로오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에 의사겸 통역관으로 동승하였다(2차 전도여행, 1832.2.26.~9.5.). 이 배의 파송 목적은 상업적인 데 있었으나 그는 모리슨이 준 한문 성경을 다량으로 싣고 떠나 그의 목적이 개척선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배는 마카오를 출발하여 산동 해안을 탐방한 후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 같은 해 717일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 백령군도의 한 섬에 정박하여 지방장관을 통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25일 충청도 서해안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관할 하에 있는 섬)에 정박했다.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 김영수(金瑩綬)를 통하여 순조(純祖)에게 서양 물품과 함께 성서 2, 교리서 수십종이 포함된 헌상품과 함께 영국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주문(奏文)을 올렸다. 회답을 기다리는 한달 가량 지방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주민들에게 성경과 전도문서와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감자 종자를 주며, 그 심는 법과 저장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또한 이민회의 서생 양이(김양선은 이를 양씨로 본다)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 또한 달레(C. Dallet)한국천주교회사에는 배에 야소기독지교(耶蘇基督之敎)라는 한문으로 쓴 큰 깃발을 달고 있어 이를 보고 천주교인들이 관원의 눈을 피해 배 위에 올라갔으나 기대했던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신부가 아닌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맞이하자 실망하여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20일간 기다리면서 선교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정에서 내려온 통역관 오계순(吳繼淳)은 조선으로부터 중국의 변방으로 중국의 허락 없이 통상할 수 없다는 정부의 의견과 헌상품을 되돌려 받고 떠났다.
  • 그의 방한기간이 극히 짧았기 때문에 뚜렷한 성과는 볼 수 없었으나 한반도를 방문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최초의 한글 성서번역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1834
  • 1834년 모리슨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1835
  • 1835년 영국 무역 감독관겸 수석통역관이 되었다.
 
1837
  • 일본 선교에 뜻을 두어 1837년 모리슨호를 타고 일본에 갔다가 포격을 받아 되돌아오고 말았다.
  • 1837년 일본어로 요한복음ㆍ요한서신을 번역하여 싱가포르에서 간행하였다.
 
1843
  • 1843년 홍콩 관청에서 근무하였다.
 
1844
  • 1844년 중국인 선교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1851
  • 8948세로 홍콩에서 사망하였고,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되었다.
  • 귀츨라프가 최초로 발을 내딪었던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에는 2005년에 귀츨라프 기념교회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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