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최초의 내한 정주 선교사, 의사, 외교관.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안련(安連),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최초의 내한 정주 선교사. 의사. 외교관.
 

1858
  • 18584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호레이스 알렌(1804-1893)과 제인(1817-1891)5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 알렌의 집안은 미국 독립운동 및 남북전쟁에 공을 세운 명문가였고 부농이었다.
 
교회 생활
  • 알렌이 대학 이전에 받은 교육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10대 초반부터 델라웨어(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는데, 이 교회는 그가 의료선교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선교사 등 다수의 선교사를 배출했는데, 특히 이 교회의 혼(Abram D. Hawn) 목사는 젊은이들에게 영적 감화를 주어 목회자와 선교사가 되도록 하였다.
 
1877
  • 1877년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81
  • 1881년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교에서 과학 전공으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교를 다니던 중 장차 부인이 될 프랜시스(1859-1948)를 만났다. 프랜시스 역시 집안이 독립유공자 집안이었고, 영특하고 교양있는 숙녀로 성장했으며, 재학 중 이미 선교사가 되고자 하였다. 프랜시스는 알렌과 같은 해에 졸업하면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프랜시스는 알렌이 선교사로, 또한 외교관으로 사역할 때 주로 내조를 하였다.
  • 1881년 델라웨어 인근의 콜럼버스 소재 스탈링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에 힘쓰는 한편, 당시 관행대로 면허증 취득을 위해 맥도웰(John O. McDowell)을 사사했고, 1년 뒤 맥도웰의 모교인 마이애미 의과대학으로 전학했다.
 
1882
  • 1882년 알렌이 아직 의대생일 때, 혼 목사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총무 로우리(John C. Lowrie, 1808-1900)에게 알렌에 대해 소개했다.
 
1883
  • 18833월 알렌은 의사가 되었고, 1883326일 선교사 지원이 수락되어 중국선교사로 임명되었는데, 담당 총무가 한국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엘린우드(Frank F. Ellinwood, 1826-1908)로 변경되었다.
  • 선교사 임명 직후인 1883517일 프랜시스와 결혼하였다.
  • 188310월 중국에 도착하였으나, 부인의 건강 문제로 인해 최초 임지에 부임하지 못한 채 상하이 등에 거주하던 중, 임지 확정 문제 등으로 선교사 간에 갈등이 빚어지자, 당시 새로운 선교지로 부상했던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
  • 알렌이 한국행의 가능성을 타진하던 중, 1884722일 엘린우드로부터 한국행을 수락하는 전보가 도착했고, 98일 선교본부가 그를 한국선교부로 이적했다. 알렌은 단신으로 920일 이전에 부산에 도착한 뒤 제물포를 거쳐, 922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인 923일 공석이었던 미국공사관의 무급 공의가 되었는데, 이후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 혜택을 베풀면서 폭넓은 인맥을 쌓았다.
  • 알렌은 중국으로 일단 다시 돌아갔다가 1026일 가족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정주 선교사가 되었다.
  • 알렌은 입국 직후 발생했던 갑신정변(1884)으로 인해 자상을 입은 왕족 민영익을 외과술로 살려내어,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한편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어,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다.
 
1885
  • 이를 계기로 서양식 병원 설립을 시도하였고, 1885112일 당시 주한 미국공사(특명전권공사)인 푸트(L. H. Foote)를 대신하여 대리공사가 되었던 폴크(G. C. Foulk)를 통해 조선 왕실에 병원 설립 허가를 신청했다. 이 병원은 일종의 정부와 선교부의 합작병원 형태로 시작되었고, 설립안에는 왕립병원이 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의과대학 모두가 그 기원을 이 병원으로 소급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병원은 1885410일 개원했고, 412일 광혜원이란 명칭을 얻었다가 얼마 후인 426일 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 알렌은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시에, 최초의 거주 선교사로서, 후발주자로 입국하기 시작한 다른 선교사들이 정착하는데 다양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선교 정책 차이 등으로 선교사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갈등은 알렌이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경력을 바꾼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1887
  • 1887년 알렌은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면서 선교사를 사임했고 제중원을 떠났다.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미국에서 머물렀다)
 
1889
  • 1889년 귀국 후에는 신분이 불안정했는데, 참찬관을 사임한 뒤 선교사로 재임명되었다.
  • 1889년에 부산에 머물렀다.
 
1890
  • 1890년에 인천에 머물렀고, 제중원 2대 원장 헤론(1856-1890)이 별세하자 잠시 제중원을 맡았다.
  • 1890년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면서 선교사를 사임했다.
 
1893
  •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1895
  • 운산금광채굴권을 획득하여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겼다.
 
1896
  • 제임스 모스와 함께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다. 제임스 모스가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팔아버렸다(1899).
 
1897
  • 1897년 주한공사 및 총영사(혹은 변리공사)가 되었다.
 
1900
  • 1900년 설립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의 설립자 중 일원이 되었다.
 
1901
  • 1901년에는 특명 전권공사로 승진하였다.
 
1903
  • 1903년에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대한정책을 놓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격론을 벌였다.
 
1905
  • 그러나 19053월 해임된 후 마침내 6월에 귀국했다. 모건(E. V. Morgan)이 알렌의 후임이 되었고, 미국공사관은 을사늑약 직후 19051117일 폐쇄되었다.
 
1908
  • 알렌은 귀국 후 의사로서 생활을 하였고, 1908년에는 대표작인 Things Korean을 출간했다.
 
1909
  • 1909년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한국선교 25주년 기념 보고서에 축하 논문을 보냈다.
 
1932
  • 알렌은 19321211일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에서 별세하였고, 우드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부인 프랜시스는 19486월 별세하여 알렌 옆에 묻혔다. 자녀는 호러스(Horace Ethan)와 모리스(Maurice) 두 아들이 있다.
  • 알렌은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번 훈장을 받았고, 마지막으로는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그의 사후 유족들이 이 훈장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이것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그는 한국 사정에 정통한 외교관으로서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이민 등 다방면에 관여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하와이 이민 송출 등의 사업에 관여했고, 한국을 둘러싼 제국들의 관계 속에서 복잡 미묘한 입장을 드러냈다.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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