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0일 수요일

김영훈 [金永勳, 1877~1939] 장로교 목사, 산둥지방 선교사,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영훈 [金永勳, 1877~1939]

장로교 목사,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13년 당시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송한 3명의 선교사가 현지에 함께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박태로ㆍ김영훈ㆍ사병순 선교사다. 모두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성경책을 들고 있다. [출처] 기독일보


1877
  • 53, 평북 의주군 월하면 호암동에서 의주부사였던 김유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7
  • 의주 부사 김유현이 김관근의 인도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김유현의 장남 김영훈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905년에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08
  • 3,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이 설립한 장로회신학교에 그를 입학시켰다.
 
1910
  • 월하면의 교회를 돌보는 조사가 되었다.
 
1911
  • 대동군 읍교회에서 교역자로 시무하였다.
 
1912
  • 평북대리회가 노회로 승격되면서 평북노회 소속으로 신학계속 추천을 받았다.
 
1913
  • 219, 평북 선천읍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 장로 안수자로 보고되었다. 김영훈은 평안북도 월하면 호암교회 장로로 안수받게 되었으며 호암교회는 비로소 당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동군(同郡) 월화면(月華面) 호암교회(虎岩敎會)가 김영훈(金永勳)을 장로(長老)로 안수(按手)하여 당회(堂會)를 성립(成立)하다
  • 612,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6). 당시 졸업식에 김영훈은 기도를 인도하였다.
  • 9월에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장로회 총회의 결정으로 선교사로 피택되어 중국 산동에 부임하였다. 동행된 선교사로는 박태로ㆍ사병순 등이다.
  • 김영훈은 가족을 데리고 191311월 산동 선교팀과 함께 내양현 서문내에 가서 중국인 가옥을 임대했다. 내양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양현의 지사로부터 큰 잔치를 베풀겠다는 초청장을 받은 답례로 그가 보낸 한시에서 내양선교의 물꼬가 텄다. 그 한시는 지사가 기독교인이 될 것을 간절히 권고하고 신자가 되면 선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양현에서 가장 유식한 한학자 장수명이 이 시에 감동하여 그를 방문하였고 70세가 넘은 이 노학자는 첫 개종자가 된다. [미주크리스천신문 기사]
 
1917
  • 김영훈은 사병순과 함께 19174월 선교지를 이탈하고 환국했으니 선교활동 35개월 만이다. 그러나 총회는 이들에게 위로하는 편지와 주의 일을 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편지했다. 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었던 그가 1927727일자 기독신보에 기고한 회고담에서 그의 철수는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총회전도국이 선교사에게 서양 선교사들과 같이 풍족하지 않더라도 제반시설을 마련했어야 했다면서, 빈약한 가운데서 최선을 다했고 철수에 앞서 선교목적을 완수했고 선교 토대 또한 구축했음을 주장했다. [미주크리스천신문 기사]
  • 720,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활동에 참여하였다.
  • 10월부터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
  • 샌프란시스코 한인 소년서회를 넘겨받아 서회 경영에 나섰다. (원래 주원 씨의 소유물이었으나 그가 119일에 귀국하면서 김영훈 목사가 넘겨받았다) 11월까지 운영하다가 서적 사업 전부를 흥사단 본부로 매각 처리하였다.
  • 1월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법무원을 맡으면서 미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 10월에 상항한인교회에서 모인 북가주한인감리교회 지방연회에서 최진하와 더불어 상항한인교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1919
  • 미국 남감리교회 파송으로 19196월에 삭도(새크라멘토)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1920
  • 김영훈 목사는 192010월 11일에 샌프란시스코 한인 예배당에서 열린 한인교회 지방회에도 참석하였다.
 
1921
  • 19219월에 개최되는 본국 장로회 총회에 편지를 보내어 중국 산동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청원하였다.
  • 1013일에 열린 감리교 지방회에서 새크라멘토 관리목사 직을 내려놓았고, 순행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맨티카와 맥스웰, 윌로오스, 스탁톤 등 북가주 일대에 흩어져 노동하는 한인에게 복음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일깨워주는 일로 동분서주했다.
 
1922
  • 192231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김영훈 목사는 감리교 지방회와 미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을 마감하고 1922년 봄에 귀국하게 된다.
  • 김창건 목사가 의주군 서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였고, 그 후임으로 김영훈 목사가 부임하였다.
  • 의산노회에서 목사총대로 선출되었으나 19229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11회 총회에는 불참하였다.
 
1923
  • 31, 서교회에서 김영훈 목사의 위임예식이 의산노회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 313, 신의주제일교회 한석진 목사 위임식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만 2년 동안 임시목사로 시무하다가 교인 다수의 청원에 의하여 의산노회 허락을 받아 위임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 827일 제10회 의산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 98일 신의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목사 총대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개회예배 기도를 인도하였다.
  • 911일 오전 11, 계속 진행된 총회 석상에서 요한복음 211-17절을 낭독하고 교역자 양성이란 문제로 강도(講道)하였다.
  • 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전도부 3년 위원과 산서노회록 검사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림준철(林俊哲) 목사, 라자승(羅子承) 장로와 함께 의산노회 재단 실행위원으로 보고되었다. 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피해를 위문하기로 동의가결(同意可決)하고 김영훈 목사, 경충노회의 박용희 장로를 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1924
  • 213일부터 의주 체마(替馬)교회 예배당에서 회원 70명이 회집하여 개최된 제11회 의산노회에서 노회장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 12회 의산노회는 192483일부터 3일간 노회장 김영훈 목사 사회로 회무를 처리하였으며 역시 서교회에서 828일부터 93일까지 의산노회 제직사경회를 개최하였다.
  • 1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913일 함흥읍 신창리 예배당에서 회집되었는데, 의산노회 대표로 노회장 김영훈 목사와 김석항(金碩伉), 안승원(安承源), 김취곤(金聚坤), 최성주(崔聖柱) 목사, 홍하순(洪河順), 김병률(金丙律), 조보근(趙普根), 리가은(李稼殷), 김시혁(金時爀) 장로, 남행리(南行理) 선교사가 참석하였다.
  • 13회 장로회 총회에서 김영훈 목사는 양전백, 함태영 목사와 같이 총회 사기(史記) 검열위원에 선정되었고, 공천부 정기위원, 경북노회록 검사위원, 신학교육부(3년조) 위원, 외지(外地) 전도부(2년조)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
  • 김영훈 목사는 양실학교 교장의 임무도 맡고 있었으며 유여대(劉如大) 목사와 교목의 일도 겸임하였다.
  • 9월에 개최된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총대로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외국전도부(1년조) 위원, 신학교육부(2년조), 사기(史記) 검열위원 직책은 유지하고 있었다.
  • 그는 한학자요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92512월 기독신보(基督申報)에는 그의 서예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1926
  • 김영훈 목사가 소속된 의산노회는 성경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일반 교역자들이 합동하여 일하던 중 1926223일에 의주(義州) 비현예배당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정하였으며 회장에 한석진 목사, 부회장에 김영훈 목사가 선출되었다.
  • 1926911일부터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서 개회된 제1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노회장 한석진(韓錫晋), 서기 홍하순(洪河順) 목사 외 여러 총대들과 참석하였으며 함태영, 량전백 목사와 총회 사기 검열위원을 계속 맡았고 신학교육부 1년조 위원이자 신학교 이사, 총회 신학교육부장으로 수고하였다. [총회 신학교육부 임원은 부장 김영훈, 서기 김건우 그리고 림택권, 변린서 목사로 조직되어 있었다.]
  • 1926914일에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서 거행된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6회 졸업생회 정기총회에서 김영훈 목사는 간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
  • 1927년이 되면서 김영훈 목사는 양실학교 교장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의 후임으로는 서교회 동사목사인 홍하순 목사가 선택되었다.
  • 99일 원산에서 개최된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 1927년의 산동선교 폐지 움직임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여 산동선교를 지속시키는 데 역할을 하였다. [한국장로신문 연재기사]
 
1928
  • 2월에 분규사건(박승명 목사 성추문)으로 혼란한 경남 마산교회(현 마산문창교회)를 방문하였다. [한국장로신문 연재기사]
  • 9월 제1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 직책을 잘 마쳤으며 신학교육부장,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실행위원, 총회사기 검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청산유치원 원장으로 수고하였다(1932년까지).
 
1929
  • 38일에 거행된 서교회 강리순 장로의 장립식과 리근호, 조윤길, 김응명 씨의 집사 장립식 사회를 맡아 보았다.
  • 323일에는 청산유치원(靑山幼稚園) 졸업식 사회를 맡았으며 남녀 32명이 졸업하였다.
 
1930
  • 1930718일부터 822일까지 사기 수정위원회가 소집되었으나 위원 가운데 량전백 목사는 신병(身病) 때문에 불참하였으므로 김영훈, 함태영 목사 두 사람만이 중국 안동현에 회집하여 장로교회사(長老敎會史) 4편 수정작업을 하였다.
 
1931
  • 김영훈 목사는 19311015일에 거행된 서교회 장로장립식 사회를 끝으로 공식 활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32
  • 19322월 중순에 개최된 의산노회에서 서교회 사면(辭免) 허락을 받았다.
 
1939
  • 별세하였다.
  • 안타까운 말로에 대한 김경하 목사의 회고 [바로가기]
    “사경회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대접을 받으러 가는 길에 우리나라 장로교회 총회에서 제1대 선교사로 산둥에 파송됐던 김영훈씨를 만났던 일이 있다. 그날 그는 술에 만취돼 지나가고 있었데 최득이 목사님이 그를 지목하며 저이가 김영훈씨인데 저렇게 타락됐다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고 떨리는 마음을 가졌다...” 이는 의산노회 겨울 사경회 강사였던 김경하 목사의 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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