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요일

김익두 [金益斗, 1874~1950] 장로교 목사. 장로교 제9회 총회장. 부흥사.

김익두 [金益斗, 1874~1950]

장로교 목사. 부흥사.
 

1874
  • 113,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坪村)리에서 부친 김응선, 모친 전익선(田益善)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서는 13일에 출생했다고 함]
 
1886
  • 13세에 부친을 여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1893
  • 20세 이후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해) 청년시절 술과 기생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900
  • 27세 되던 1900년에 안악교회에서 서양선교사 스왈른(W.L. Swallon ; 蘇安論)영생이란 설교를 듣고 감동되어 그해 1월에 신앙을 고백하고 입교를 하였다. 김익두와 같은 악명 높았던 부덕의 사람을 인도한 이는 박태환(朴泰煥)이었다.
  • 7월에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1
  • 재령읍교회의 전도사로 첫 교역의 발을 들여놓았다.
  • 10월 스왈른의 권유로 신천(信川)으로 옮겨 전도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곳 교회와 일생의 연관을 맺는 첫 날이 되었다. 그는 장터와 길거리에서 수모를 겪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여 마침내 세 사람의 구도자를 얻어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어느 부호의 8백원(현재 가치로 8억원) 헌금으로 예배당을 마련하여 교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신천교회의 시작이다.
 
1906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
  • 6,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3). 그때부터 5천여원의 헌금을 바탕으로 새 교회당을 건축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 725, 셋째 아들 김용식이 출생하였다. (김용식은 대한민국 제1세대 축구선수ㆍ감독이다)
 
1919
  • 가을부터 서울의 남문밖교회를 이재형과 함께 상계(相繼),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신천교회를 떠났음이 확실하다.
  • 12, 경북 달성군 현풍(玄風)교회에서 턱이 떨어진 박수진(朴守鎭)이란 걸인을 낫게 하였다(최초의 이적).
 
1920
  • 631, 평양 집회에서 평양시 7교회가 연합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6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6만여원에 이르는 놀라운 헌금이 바쳐졌다.
  • 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 10, 서울 승동교회에서 서울시 7교회 연합부흥회에 1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1921
  • 7, 임택권ㆍ장홍범ㆍ유만섭ㆍ오득인ㆍ김용승 등은 이적증명회란 것을 만들고, “진리의 말씀을 세상 학설에 붙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 가운데 의심하던 자들의 참회와 신앙을 위해서, 김익두의 이적 사실들을 수집하여 이적증명서란 책자를 발간하였다.
 
1922
  • 59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조선 기독교도의 각성을 촉하노라란 글을 싣고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迷說) 기적을 추구하는 감이 적지 않다고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지 실용하여 민족화 문화화하라고 촉구하였다.
  •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였다(1922~1927).
 
1923
  • 8, 함경북도 회령 경찰서에 의하여 그곳 교회에서 그가 전도강연중 병자를 치료한다고 일반인을 미혹했다 하여 과료(科料)처분을 내렸다.
  • 황해노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1923년 총회에 우선 장로교 정치 헌장 제3장 제1조의 문구수정안을 헌의하였다. 그 조항에는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란 글이 들어 있었다.
 
1926
  • 3, 간도 용정중앙교회에서 일부 반종교가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
  • 5, 세브란스 의전학생들이 많이 출석하는 남문밖교회의 제직회에서 김익두의 시무정지 및 제명요구 등이 문제시되었다.
  • 521, 전라북도의 좌익계 전북민중운동자연맹이리청년회에서는 김익두를 고등무당이라 하여 6명의 비판 연사로 비판대회를 개최하였다.
  • 521, 조선일보는 김익두의 기사 이적을 영계를 팔려는 것이라고까지 혹평하였다.
 
1930
  • 112, 남문밖교회를 시무하다가 경기노회 임시노회에서 황해노회에로의 이명청원이 수리되어 다시 신천교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경기 임시노회가 1930112일 갑자기 회집된 까닭은 김익두 목사의 이명 때문이었다.
 
1935
  • 78,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38
  • 710,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승동교회를 사임하였다.
 
1941
  • 신의주 제일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일경에 붙들려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채정민(蔡廷敏) 목사가 그의 실절(失節)을 꾸짖었다.
 
1946
  • 11, 북한 공산당의 강요 때문에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49
  • 기독교도연맹 총회의 총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외조부격인 전 목사 강양욱의 감언이설 때문이었으나 김익두 자신의 허물임에 틀림없었다.
 
1950
  • 1014,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하여 교회당 안에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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