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3일 토요일

양전백 [梁甸伯, 1870~1933]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교육자,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1인,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양전백 [梁甸伯, 1870~1933]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교육자,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
본명 섭(), 호는 (格軒), 자는 전백(甸伯)이다.
 

1870
  • 310, 압록강 부근인 평북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출생하였다.
  • 양전백은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21세손으로 양반 가문의 후예였다.
  • 그동안 양전백 목사의 출생 연도는 1869년으로 알려져 왔다. 3·1운동 관련 양전백 신문조서(1919. 4. 25)에 나이를 50세로 밝힌 것을 만 나이로 환산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양전백 목사의 서거 직후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神學指南)152(1933. 3)에 실린 약력에는 ‘1870(庚午) 310출생으로 명시되어 있다. 3·1운동 당시 50세를 한국식 나이로 환산하면 1870년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학지남에 실린 약력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보고 그에 따르려 한다.
 
1878
  • 9세되던 해 집안이 파산 지경에 이르러 고관면 관동리로 이주하였다.
 
1884
  • 이후로도 계속 가세가 기울어져 1884년에는 가산을 정리하여 구성군 천마면 소림동 산골로 이주하였다.
  • 본래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15세때 이미 시부(詩賦)에 능통하였으며 구성군으로 이주한 후에는 향리에서 서당 훈장으로 있었다.
 
1888
  • 자신의 학문이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빈손으로 집을 나가 주유하던 중 의주군 송장면에 있는 당대 영남 퇴계학의 거두이자 퇴서백선(退暑百選)의 저자 이정로(李挺魯) 선생 문하에 들어가 경의학(經義學)을 수학하여 학문의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 귀가하여 박영신(朴永信)과 결혼하였으며(19) 계속 향리에서 훈몽(訓蒙)을 업으로 삼고 지냈다.
 
1892
  • 의주에서 온 전도인 김관근(金灌根)으로부터 전도받았으나 처음에는 듣지 않고 있다가 그해 9월 다시 김관근이 찾아와 관장을 구실삼아 서울에 함께 갈 것을 유혹하였다. 이에 동조한 그는 김관근과 동행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전국 도사경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1893
  • 이를 계기로 복음을 접하게 되었으며 귀가한 후에는 서당에서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으며 주일마다 친구 수십인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 이 사실에 대해 1918년에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先是里老 金利鍊 及 其次男 金灌根宣敎師 馬布三悅에게 福音得聞하고 父子同信하야 隣人에게 傳道하니 元龍珠張應壁金振瑾金秉甲梁甸伯 等亦信이라 當時禮拜處所하야 會集치 못하더니 金利鍊洞民協議하야 學堂創設하고 梁甸伯敎師廷聘하야 主日信者學生學堂에셔 禮拜하더니……
    이는 신시교회 설립을 1893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때까지 그는 능동적인 교인은 아니었다.
 
1894
  • 동학란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으로 발전되어 학당이 파괴되고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와 마펫(S. A. Moffett, 마포삼열)을 만났다. 이때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고, 이에 비로소 명실공히 기독교인이 되었다.
  • 양전백은 집을 처분해 4백냥을 마련하고, (Graham Lee, 李吉咸) 선교사가 보낸 보조금 2백여 냥을 더하여 초가 6칸을 사들인 다음 수리를 해서 예배당으로 만들고 김관근을 조사로 세워 신시교회(新市敎會)를 설립하였다.
 
1895
  • 평양으로 가서 마펫을 만나 정식으로 북장로회 권서(勸書)직을 받았다.
 
1896
  • 189612월 양전백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가 평안북도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자, 권서직을 그만두고 그의 조사가 되어 동역을 하였다.
  • 위대모와 함께 삭주군 읍내교회를 세웠다.
 
1897
  • 선천에서 그는 각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두 무리의 교인들을 규합해 1897년 가을 선천읍교회를 설립하였다.
  • 위대모와 함께 철산군 읍내교회ㆍ학암교회를 세웠다.
 
1898
  • 휘트모어(위대모)가 선천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그도 선천으로 이주하여 1897년에 설립된 선천읍교회(후에 선천북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 위대모와 함께 철산군 평서교회를 세웠다.
 
1900
  • 선천읍교회에서 평안북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을 때 관서전도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교인 자녀 교육을 위해 명신(明信)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었다.
 
1901
  • 위대모와 함께 선천군 동립교회, 정주군 청정교회를 세웠다.
 
1902
  • 2, 선천읍교회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장로장립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00년에 김종섭과 서경조, 1901년에 길선주와 방기창이 장립되었고, 양전백은 5번째 장로였다]
  • 마포삼열은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와 함께 양전백을 평양 장로회신학교 목사후보생으로 선발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선교정책에 따라 3개월은 평양에 거주하면서 공부하지만 나머지 9개월은 현지에서 목회와 전도를 하면서 5년을 훈련받는 제도였다.
 
1903
  • 장로교공의회 안의 조선어공의회서기를 역임하였다. [이시기 선교사들은 토착장로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 장로들의 훈련과 지도력 향상을 위해 목사 선교사들만 참석하던 장로교선교사공의회”(1893~1900)를 개편하였고, “장로교공의회”(1901~1906) 안에 영어공의회조선어공의회를 두었다. 조선어공의회 서기는 제1대와 제2대가 서경조 장로였고, 3대가 양전백 장로였다.]
 
1904
  • 위대모와 함께 선천군 신미도교회를 세웠다.
 
1906
  • 김석창(金錫昌)ㆍ노정관(魯晶琯) 등 선천 기독교인과 힘을 모아 중학교 설립을 추진, 19077월 신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 초기에 선천읍교회의 공간을 빌려 26명의 학생에 6인의 교사진으로 출발한 신성중학교는 1909년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미국 독지가의 기부금을 받아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고 학교의 경영권을 넘겨 받음으로써 미션 스쿨로 개편되었다.
 
1907
  •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를 길러내는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한석진ㆍ길선주ㆍ방기창ㆍ이기풍ㆍ송린서ㆍ서경조 등 7인이 함께 목사안수를 받아 한국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가 되었다.
    “회장(마포삼열ㆍ마펫)이 신학교 졸업학사 서경조, 방기창,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양전백, 한석진 7인의 시재할 강도와 해석을 14인 목사로 검사위원을 정하여 금일 하오 칠시 삼십분에 보고하라 하시고, 또한 칠인에게 문답을 허하시매 이눌서 씨는 신학을 묻고 안이와 씨는 정치를 묻고 전위렴 씨는 성화 사기를 묻고 기일 씨는 성경 내력을 물은 후에 우종서씨가 문답 그르치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회장(마포삼열)이 신학사 칠인의 문답이 어떻게 됨을 물으심. 배위량 씨가 문답을 잘 하였으니 시재할 강도와 해석을 보고함을 듣고 목사 장립하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성하다.”
  • 당시 38세로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학식에 있어서는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은 양전백은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북도와 남만주 일대를 순행하는 목사로 2년간을 시무하였다.
 
1908
  • 선천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09
  • 선천읍교회 전임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별세할 때까지 25년을 시무하였다.
 
1910
  • 1910년에 명신학교의 교장을 맡아 교실을 건축하여 2백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발전시켰다. YMCA 1회 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연사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 구원을 위한 삶의 헌신에 대해 설파하였다.
  •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0년 가을 양전백, 이상재, 최병헌 등 한국 내 각 교파의 명망있는 교역자 17인을 초청해 일본시찰을 시켰다.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주눅 들게 하여 회유 포섭하려는 속셈에서였다. 그러나 시찰단 일행은 기죽지 않고 일본의 정치가와 종교가들 앞에서 일본의 풍요한 물질문명과 종교 도덕의 빈곤을 대비시키며 그것을 풍자하였다고 한다. 시찰에서 돌아온 양전백은 사람들에게 영국이 100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을 일본이 30년만에 이루었다면 한국인이 이를 10년에 이루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종교 도덕의 각성과 각종 사업에 힘쓸 것을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1911
  • YMCA 제2회 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연사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 구원을 위한 삶의 헌신에 대해 설파하였다.
  • 일제가 서북 기독교세 박멸을 목적으로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소위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는데 선천의 기독교 대표자중 한 사람인 양전백 목사도 이때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했다.
  • 10월 양준명을 비롯한 선천 신성중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대거 검거될 때 양전백 또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38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양전백을 포함한 123명이 경무총감부에 의해 정식 기소되었다. 기소 과정에서 양전백은 일제 관헌에게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당했다. 그에 대해 당시 그와 같은 감방을 썼던 선우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양전백 목사는 그 성명을 모르는 이 없이 교계의 태두로 존숭을 받는 성자다운 어른이시다. 9시경에 수갑찬 손에 콩밥 한 움쿰을 들고 다리를 절며 의복을 거두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방안에 들어서서 미친 사람같이 손바닥에 콩밥만 핥어 잡수신다. 머리털 전부가 뽑혔고, 한 개 수염도 없었다. 내 곁에 앉았으되 반죽음 상태가 된 그는 문안도 없고 대답도 없다.”
 
1912
  • 5월 양전백은 다른 122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 628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 928일 재판부는 123명 중 105인에 대해 징역 5년에서 10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선천지역 신민회의 주요 간부로 분류된 양전백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105명은 모두 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 경성복심법원에서 1126일부터 1913320일까지 5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1심 공판 과정에서 사건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자, 항소심부터는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인과 증거 제출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항소심 판결에서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 방면되었다.
 
1913
  • 복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1913년에 석방되었다
  • 3년만에 다시 강단에 선 그는 나는 이제 敎職하여야 되겠습니다. 軟弱肉身을 가진 나는 在監中 痛楚에 익이지 못하야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敎壇에 설 수 없는 가 되었습니다라고 비장한 첫마디를 내놓자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신학지남(1993.3), 31]
 
1914
  • 평북노회장이 되었다.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이 되었다.
 
1916
  •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 1916년 총회는 에큐메니컬 차원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두 개 감리교회(남과 북)와 함께 장감연합공의회를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그 준비위원으로 양전백(총회장), 함태영(서기), 배유지(증경총회장)을 선임하였다.
 
1919
  • 26 저녁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간부로 활약하던 선우혁(鮮于赫)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선우혁은 신성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른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양전백의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며 양전백에게 1월부터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전승국과 중립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데,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부탁하였다. 선우혁에게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소식을 들은 양전백은 독립운동의 취지에 동감을 표하면서, 그러나 당장은 경찰의 단속이 심해 모금이 어려우니 일단 압록강 건너 만주 안동현으로 가 있으라고 답을 하였다. 때마침 선천에서는 약 30명의 목사와 80, 90명의 장로, 그리고 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한 대규모의 사경회(査經會)가 열리고 있었다.
  • 기독교계와의 교섭을 위해 급히 상경할 것을 요망한다는 최남선의 전언이 29경 인편으로 선천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던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에게 전달되었다.
  • 최남선의 연락을 받고 급거 상경한 이승훈은 211 서울 계동 김성수의 거처에서 송진우와 만나 기독교계를 움직여 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에 쾌히 승낙을 하고, 남대문밖교회에 들러 함태영 조사의 동의를 구한 뒤 동지 규합을 위해 선천으로 향하였다.
  • 212 선천에서는 사경회에 이어 평북노회가 열렸는데, 노회를 마친 뒤 양전백의 집에서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승훈, 이명룡 등 5인의 목사와 장로가 따로 모여 이승훈이 서울 다녀온 소식을 듣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 이승훈은 214 평양 기홀병원에서 길선주, 신홍식 목사와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승낙을 얻어냈다.
  •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힌 양전백은 평양에서 열린 교회 집회에서 함태영을 만나 그에게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조선총독부에 보낼 문서에 날인할 도장을 맡겼다. 당초 그는 독립운동의 방식으로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거사 직전까지 제1진으로 50명이 독립청원서를 내고, 그 사람들이 체포되면 다음으로 제2, 3진이 나서 다시 독립청원을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들 다수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상징적인 독립선언보다는 일제 당국에 청원을 하는 것이 보다 실효성 있는 독립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 223 밤 남대문밖교회 함태영 조사의 사택에서 열린 제2차 장·감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장하는 천도교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방침을 바꾸었다.
  • 양전백은 거사일이 31일로 정해졌으니 거기에 맞춰 반드시 상경하기 바란다는 이승훈의 연락을 받고 그 전날인 228 밤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 31일 오전 10에 함태영의 사택을 방문하여 거사 장소를 확인하였다. 이 때 그는 함태영에게서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건네 받고 비로소 독립선언으로 방침이 바뀐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종로 인사동의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향하였다.
  • 독립선언식은 31일 오후 2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그리고 3시경에 출동한 순사들에게 전원이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양전백은 일제의 무단통치가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일본인과 도저히 동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21
  •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1114일 마포 공덕리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을 하였다.
 
1922
  • 1월 다시 선천북교회에 귀임하여 목회하였다.
 
1926
  • 31운동으로 페허가 되다시피한 명신학교를 재건하여 1926년 천남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여 재단법인 인가를 냈다.
  • 한국 장로교회 역사편찬의 책임을 맡아 자료를 수집하고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27
  • 서울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집필 중 돌연 병을 얻었다.
 
1933
  • 117, 64세의 일기로 선천읍 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기타
  • 그의 장례는 1215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남궁억 박사의 사회 아래 기독교연합사회장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신과의 슬하에 2(윤모ㆍ윤직) 4(윤성ㆍ윤정ㆍ윤숙ㆍ윤도)를 두었다.
  • 그가 1회로 졸업한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가 실려있다.
    “선생은 웅변의 인()도 아니요, 문장의 인도 아니며, 팔면(八面) 활달한 사교의 인도 아니요, 기책(奇策) 종횡(縱橫)한 지략의 사()도 아니다. 다만 강직한 의()의 인이며, 자애 깊은 정열의 인이다. 비리와 불의 앞에서 추호도 굴치 않는 마음, 빈천과 약자를 보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 그의 유해는 선천 공동묘지 산상봉(山上峰)에 안장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6231, 양전백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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