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찬 [姜奎燦, 1874~1945]
장로교 목사, 교육자
【1874년】
- 8월 15일(음력),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 16세가 되기까지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한시뿐 아니라 천문지리에도 능해 주위로부터 과학자란 칭호를 들었다.
【1897년】
- 박영찬과 결혼하였다.
【1905년】
- 딸 ‘도성’ 출생하였다.
【1907년】
- 고종이 강제로 퇴위한 것에 대해서 대한자강회월보에 기고하였다.
【1908년】
- 장로교가 운영하던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신성중학교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등 훗날 교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909년】
- 봄,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05인 사건 재판 기록에 의함]
【1911년】
- 4월 16일, 아들 ‘도일’ 출생하였다.
- 10월 12일, 소위 ‘105인 사건’으로 인해 양전백ㆍ이승훈 등과 함께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다.
【1913년】
- ‘105인 사건’으로 1심에서 유죄 언도 받은 강규찬, 김동원을 비롯한 99인 무죄 석방됨
【1914년】
- 선천읍북교회 장로로 임직하였다.
- 출감 후 다시 신성학교에 복직하였으나 사상범으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1914년 신성중학교를 사직하고 선천북교회 조사로 임명받음으로써 목회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1915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에 입학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7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10회).
- 목사 안수를 받았다.
- 6월 14일 제12회 평남노회에서 산정현교회 목사 청빙을 허락하였다.
- 6월 17일, 산정현교회 제4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 6월 24일,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위임식을 진행하였다.
【1918년】
- 1월 6일, 집사 양성춘을 장로로 선임했고, 김동원을 주일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 김찬성 목사를 초청하여 일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1919년】
-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숭덕학교 교정에서 열린 만세시위 대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격려연설을 하여 재차 투옥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 4월 10일, 강규찬 목사 출옥하였다.
【1929년】
- 6월 3일, 아내인 ‘박영찬’ 소천하다
- 7월 31일, 기독신보에 ‘재외동포구원문제’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였다.
- 총회 전도국장을 맡았다.
【1933년】
- 5월 30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를 송창근 목사에게 이양하였다.
- 선천동교회 목사로 부임하다.
【1935년】
- 선천동교회 사임하고, 선천 봉동교회에 부임하였다.
【1936년】
- 4월 30일,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에서 전국목사수양회를 인도하다.
【1938년】
- 그가 이적한 평북노회에서 한국 장로교 최초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동참한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1940년】
- 당시 선천 봉동교회(鳳洞敎會)에서 시무하였다.
【1941년】
- 선천군 봉동교회 사임하고 선천읍북교회 분규 중 2년간 북교회에서 임시로 목회하였다.
【1943년】
- 선천읍북교회 임시당회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 4월 9일, 선천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2006년】
-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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