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3일 토요일

이기풍 [李基豊, 1865~1942] 장로교 목사, 순교자,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1인

이기풍 [李基豊, 1865~1942]

장로교 목사, 순교자,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1
 

1865
  • 1223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 할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한 이춘배(李春培)이며, 이춘배는 아들 셋(京鎭, 濟鎭, 在鎭)을 두었으며, 둘째 제진은 외아들 기풍(基豊)을 두었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에 참여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였다.]
 
1883
  • 1883년까지 개인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0
  • 본시 괄괄한 성격의 이기풍은 싸움과 술주정으로 세월을 허비하던 중 1890년 어느날 평양 서문통의 네거리에서 노방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던 마펫(마포삼열)에게 돌을 던져 크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였다. [마펫에게 돌을 던진 때가 189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1891
  • 1891년부터 1893년까지 평양에서 포졸 일을 하였다.
 
1894
  •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원산으로 피난갔는데, 이곳에서도 신자들을 박해하다가 전도인 전군보(田君甫)에게 전도받고 즉시 회개하였다.
  • 스왈른에게 세례받고 입교하였다.
 
1898
  • 마펫을 찾아가 지난 날의 과오를 자백하였고 이후 열심히 믿어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직분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 복음전파에 앞장서게 되었다.
  • 1898년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원산 지방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넘겨주었다. 스월른 목사와 그의 한국인 협력자 이기풍 조사는 1899년부터 황해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이기풍과 김구 선생의 만남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1942년 순교시까지 때때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1902
  • 1902년부터 1907년까지 황해도 안악ㆍ문화ㆍ신천ㆍ장연ㆍ해주 등지의 조사로 시무하였다.
 
1903
  • 선교사 마펫의 권고를 받아들여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때 길선주ㆍ양전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신학생으로 공부하였다.
 
1907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1).
  • 독노회에서 서경조ㆍ길선주ㆍ양전백ㆍ한석진ㆍ방기창ㆍ송린서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의 목사안수를 받았다.
  • 독노회의 결정에 의해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선교사로 임명되어 곧 부인 윤씨(선교사 이길함의 양녀, 숭의여학교 제1회 졸업생)와 함께 임지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 윤함예는 원래 양반집 자녀였는데, 중병에 걸려 예수를 믿고 낫게 되었다. 그 후 집안의 박해가 크자 그는 도망쳐 나와서 이길함 선교사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양녀로 살면서 숭의여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결국 선교사의 중매로 윤함례는 이기풍과 결혼하게 되었다.
  • 이기풍은 사모와 함께 동역하였다. 윤함예는 숭의여학교에서 현대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특별히 그는 숭의여학교에서 현대식 조산법을 배웠고, 그는 제주에서 조산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윤함예의 옆에는 항상 조산을 위한 가방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산을 도와 줌으로서 제주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뿐만이 아니라 이기풍과 윤함예는 장례식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특별히 윤함예는 시체를 잘 화장하여 염을 하였고, 이것은 주변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08
  • 이기풍 목사는 117일까지 평양에 기거하였으며, 117일에 가족과 조사 한 사람을 대동하고 평양 기차역을 출발하여 서울역에 도착하였으며, 승동ㆍ연동ㆍ새문안교회 교우들의 환영을 받은 후 승동교회에서 7일간 지냈다.
  • 124, 이기풍 목사 일행은 기차로 제물포에 도착하여 배편으로 목포에 갔다. 아마도 목포 선교부의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 다. 그는 이기풍을 가르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시 목포 선교부의 선임 선교사였다.
  • 125일부터 31일까지 이기풍 목사는 목포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 이기풍 목사는 26일부터 220일까지 실시하는 선교부의 훈련반에서 강의하였다.
  • 220일부터 25일 사이에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서 추자도에 잠시 체류하였기 때문에 19082월말 혹은 3월초에 제주도 산지포 항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1899년에 야기된 신축교난 이후의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갖는 편견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하였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내야 했지만 결코 좌절함이 없이 오직 복음전파에 전념하였다.
  • [왜 제주도였을까?]
    제주 성외지역에 살던 김재원은 중병에 걸렸으나 제주도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다. 목포에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찾아갔더니, 선교사들은 다시 서울에 있는 제중원을 추천했다.
    결국 서울까지 올라간 김재원의 상태를 제중원 원장 에비슨 선교사가 살펴보았다. 병세가 너무 심각해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비슨은 당신의 생명은 예수님께 달려있으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고, 그로 인해 김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제중원에서 김재원을 돌본 사람 중에 한국인으로 곤당골교회(현 승동교회)에 다니던 박서양이라는 이가 있었다. 백정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당대의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의사로서, 교회 장로로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제중원 그리고 에비슨과 박서양을 통해서 복음의 놀라운 가치를 전수받은 김재원은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퇴원하여 쪽 복음을 받아 들고 제주도로 돌아왔으나, 박서양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만으로는 복음 전도가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제중원의 에비슨에게 간곡히 요청했고, 에비슨은 다시 평양신학교 교장 마포삼열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그리고 이 요청에 따라 평양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이기풍이 제주 선교사로 파송받게 됐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 부임 후, 김재원은 그를 도와 제주도의 첫 교회인 성내교회를 설립했고 나중에는 장로가 된다. 제주의 영혼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김재원과 에비슨과 마포삼열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의 개척자로 사용하신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은 한국의 땅 끝, 제주를 사랑하셨다.
  • [박영효의 도움을 받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의 첫 교회인 성내교회를 세우는 데 재정적으로 적극 도운 인물이 당시 개화파 거두로 이름난 박영효 대감이다. 왜 예수를 믿지도 않았던 사람이 성내교회 예배당을 구입하는 데 막대한 헌금을 하게 된 것일까?
    박영효의 도움은 이뿐 아니었다. 190955<한성순보>에 이기풍 목사의 선교 보고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제주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처럼 오해를 산 대목이 있었다. 이를 전해 듣고 분개한 사람들이 이기풍 목사를 돌로 쳐 죽이려 할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위험을 막아준 인물도 박영효였다.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그런데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의료선교사 알렌이 치료하여 극적으로 회복시켰고, 이를 계기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세워졌다. 한편 갑신정변 실패로 주동자들이 대부분 극형에 처해지는 상황이었지만,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 후 면책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박영효는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복직된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1907년 제주로 귀양을 왔고, 이듬해 제주 선교사로 부임한 이기풍을 만났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박영효는 기독교를 통한 조선의 개화를 기대하며, 이기풍을 도운 것이다.
    성내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할 출신청의 구입비 100원을 기부한 후, 박영효는 19106월 귀양에서 풀려나 경성으로 돌아간다. 김재원이나 에비슨과 마찬가지로 박영효 또한 제주도에 복음을 전하려 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 [이기풍의 조력자들]
    개화파의 거두로 당시 제주에 머물고 있던 박영효는 이기풍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전도하러 나섰다가 격앙된 제주의 군중들 틈에서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낸 친구 송문옥, 세브란스병원애 입원했다가 예수를 믿게 된 김재원, 전도여행에 늘 길동무가 되어준 김행권, 제주의 초대장로 홍순홍, 경신학교 출신으로 제주에서 민족지도자 역할을 감당한 조봉호, 훗날 제주 출신 제1호 목사로 성장하는 청년 이도종 등도 이기풍에게 큰 의지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 [출처] 주간기독신문
 
1909
  • 제주도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홍수가 났고, 여기에 한 여인이 휩쓸리게 되었다. 이기풍은 대동강을 건너던 수영실력을 발휘해서 이 여인을 살려냈고, 이것은 제주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1912
  • 뒤를 이어 총회 파송으로 이기풍을 돕기 위하여 김홍련(金弘連)ㆍ이관선(李寬善) 전도인이 제주도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제주선교는 본격화되어 갔고 191110월 전라노회가 결성됨으로써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 속으로 들어갔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ㆍ내도ㆍ금성ㆍ한림ㆍ협재ㆍ두모ㆍ용수ㆍ고산ㆍ모슬포ㆍ중문ㆍ법환ㆍ성읍ㆍ세화ㆍ조천 등지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출처]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와 삶(교갱뉴스)
  •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설립한 교회들에 대해서, 그리고 제주의 첫 교회에 대해서는 제주교회넷을 참고하라. [출처] 이기풍 목사의 입도와 첫교회(제주교회넷)
 
1918
  • 3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현 제일교회) 초대 목사로 전임되었다.
  • 그가 다시 육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 제주도의 삶이 힘들었고, 여기에 실음증까지 생겨서 한동안 쉬어야 했다.
 
1920
  • 전라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21
  • 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장에 피임되었다.
 
1923
  • 전라남도 순천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24
  • 전라남도 고흥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27
  •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31
  •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다.
 
1934
  •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를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는데 이곳은 행정적으로는 순천노회에 속해 있는 곳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돌산ㆍ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을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 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일제 치하의 기독교 박해에도 과감하게 대처해 나갔다.
  • 이기풍 목사의 마지막 사역지는 여수의 남쪽 섬, 금오도였다. 순천선교부 프레스톤 선교사의 권유로 이기풍 목사는 벌교읍교회를 거쳐 금오도 우학리교회로 들어갔다. 총회장까지 지낸 인물이 작은 섬마을 교회로 향해간 이유는 간단했다. 복음이 필요한 곳, 복음의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선교정신 때문이었다.
  • 이기풍 목사는 우학리를 중심으로 금오도 주변 일대의 섬에 돛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돌산, 안도, 연도 등을 돌며 순회선교를 하였다. 그가 뿌린 씨앗이 지금도 여수 남부 24개 마을, 23개 예배당으로 남아 있다
 
1938
  •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기독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오니 이에 맞서 전적인 반대운동을 펴던 그는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ㆍ나덕환ㆍ김상두ㆍ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경 검속당했으며 칠순이 넘어선 고령으로 취조를 받은 후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직전에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그리고 이미 그의 나이가 70을 훨씬 넘은 나이에 이기풍 목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우학리교회의 뒤에는 일본 신사가 있었고, 이곳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기풍은 일제의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사례는 이기풍의 체포의 3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위해서 설명한 대로이다. 둘째는 미국 선교사의 스파이라는 것이다. 이기풍은 오래 동안 미국선교사와 함께 사역하였고, 그가 개척교회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선교부로부터 보조를 받았다. 일제는 이것을 문제삼았다. 1940년 미국선교사들이 철수하게 되자 순천노회는 총회에 헌의하여 원로목사로 예우하고, 지원을 호소했던 것 같다. 셋째, 묵시록 강해였다. 아마도 이기풍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천년왕국설을 믿었고, 이것을 가르쳤다. 이사례 권사에 의하면 묵시록 강의는 이기풍의 전문이라고 했다(이사례, [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 105).
 
1942
  • 과로와 고문 등으로 심히 건강을 해쳐 결국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1942620일 우학리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기타
  • 그의 유해는 그가 마지막 목회생활을 보낸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그로부터 11년 후인 195359일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부인에게 표창이 주어졌다.
  • 19621224일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하였다.
  • 이기풍 목사는 부인 윤함애씨와의 사이에 장남 이사은과 차남 이사선, 그리고 이사준ㆍ이사영ㆍ이사라ㆍ이사례 등 42녀를 두었다.
  • 영수로 벌교제일교회에서 시무했던 장남 이사은 영수는 김경신씨와의 사이에 이종근 집사(광주제일교회)ㆍ이영근 집사(예장합동측 대전동부교회, 의학박사)ㆍ이성근 목사ㆍ이인숙 권사(광주중앙교회)ㆍ이행자 권사(노인복지관 근무) 32녀를 두었다.
  • 차남 이사선씨(해방직후 별세)는 조혜라 권사(예장 합동측 교회 출석)와의 사이에 이정근 집사(시나리오 작가)와 이성숙 박사(의학박사)11녀를 두었다.
  • 이사례 권사(할렐루야교회)는 남편 신동민씨와의 사이에 아들 신광섭 교수(숭실대 사회사업학과)ㆍ신현섭 목사(예장 합동측 목사)와 딸 신혜자ㆍ신혜옥ㆍ신혜금ㆍ신혜선ㆍ신혜영 등 25녀를 두었다. 특히 이사례 권사의 자녀 중에는 차남 신현섭 목사를 비롯해 둘째 사위 나성균 목사(예장 개혁측), 넷째 사위 이홍정 목사(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가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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