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권 빈첸시오 [Vincentius Kaun, 1580?~1626]

권 빈첸시오(Vincentius Kaun, 1580?-1626)

 
권빈첸시오 가베에(1580?-1626). 일본명 嘉兵衛(또는 賀兵衛). 국내에는 강빈센트, 권빈첸시오, 권원선시오 등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 문헌에는 강만광(康萬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예수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순교한 한국인. 일본 교회 205복자 중의 한 사람.
 
본래 3천 명의 기병을 거드리던 장군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권빈첸시오는 13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임금과 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 멀리서 일본군을 보게 된 그는 그들의 진영에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고, 그래서 일행과 헤어져 곧장 일본군 진영으로 갔다. 그곳은 다름아닌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이었다. 고니시는 자신의 사위이며 쓰시마의 도주인 소 요시토모(宗義智)에게 이 아이를 맡아 보호하게 하였다. 소 요시토모는 매력 있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또 다른 어린 포로와 함께 쓰시마에 있는 아내 고니시 마리아에게 보냈다. 한편 마리아는 그 아이들이 착하고 귀여운 나며지 교회에 바치기로 하고, 먼저 권빈첸시오를 일본 예수회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였다.
 
권가베에는 1603년 규슈의 시키(志岐) 섬에서 예수회의 모레흔(P. Morejoh) 신부로부터 빈첸시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일본 말을 쉽게 배우고 또 덕행에도 빠른 진전을 보였다. 그 결과 곧 전도사로 임명되어 이후 23년 간 일본인과 조선인들에게 전교를 하면서 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 무렵 예수회에서는 그를 통해 조선에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으나 1614년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박해가 더욱 심해짐에 따라 그를 북경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는 이곳에 4년간 머무르며 조선 입국을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로 끝나자 이에 그는 1620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예수회의 졸라(J. B. Zola) 신부와 함께 전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625년 말 졸라 신부와 같이 시마바라에서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다음과 같이 배교를 일축하였다.

고국을 떠나 일본에 온 지가 30년이 됩니다. 그 동안 물론 저의 육신은 일본 양식을 먹고 살았으므로 장군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의 주인은 천상의 임금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임금에게 복종하기 위해 천상 임금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순교하기까지 14일 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나체로 손가락이 잘리고, 물고문에 반죽음이 되고, 혹심한 추위 속에서 2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등 잔혹한 고문들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는 찬미를 받을지어다라는 아름다운 글로 신앙고백을 할 정도로 믿음을 굳게 지켰다. 마침내 1626620, 그는 졸라 신부 등 7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화형에 처해져 순교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예수회원이 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감옥에서 관구장 파체코(Franciscus Pachecco) 신부 앞에서 서원을 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예수회원이 되었다. 187677,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일본 순교자 안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기독교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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