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9년, 일본 쇄국정책】
일본 막부의 그리스도교 금제는 이른바 5차에 걸친 ‘쇄국령’의 발령으로 점점 강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른바 ‘쇄국체제’의 완성 후 조선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금제를 요청하게 된다. 우선, 그 간접적 계기를 부여한 것은 1637년에 발생한 ‘시마바라(島原) 아마쿠사(天草)의 난’이라는 미나미아리아케(南有明) 해안가 주민들의 대규모 봉기이다. 163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5개월에 걸친 이 봉기를 막부는 당초부터 ‘그리스도 교도의 봉기’라고 단정하고, 농성하고 있던 자들에 대해 단 한 사람도 용서치 않는다는 방침으로 진압에 임했다. 이 봉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봉건 영주의 수탈에 대한 피지배층의 봉기, 그리스도 교도들의 종교적인 봉기라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농민 봉기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막부는 난의 진압 후인 1639년에 그리스도교의 국내 전파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일본 선교 활동의 중심국이었던 포르투갈과의 단교를 결행함과 동시에 국내의 그리스도교 탄압을 더한층 강화하였다.
이 난에 대한 정보는 조선에도 알려지고 있다. 그 정보는 난이 진압된 이듬해 1638년 3월 동래부사 정양필의 치계에 의해 조정에 도착하고 있었는데, 吉利施端, 즉 그리스도를 믿는 南蠻人들이 혹세무민하고 있으며, 이들이 일본 국내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한다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인조실록, 16년 3월 병자]. 이와 관련된 사료는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1805-1806년에 정동유가 저술한 『晝永編』 등 많은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볼 때, 당시 조선은 일본과 같이 그리스도교 문제가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일본과 조선의 권력층은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을 계기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邪敎觀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 신동규, “근세 일본의 그리스도교 금제정책과 珍島 표착 異國船의 처리”, 「일본문화연구」 제24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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