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61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

161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

 
1603년 이에야스는 에도막부 완성 후 2년 만인 1605년에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에게 권좌를 양보한다. 그가 일찍 자리를 물려준 것은 천하의 권좌는 도쿠가와 집안에서 세습함을 천명한 일이었으며, 그가 죽기까지 모든 실권은 이에야스 본인에게 있었다.
 

때마침 1600년에는 네덜란드 소속이 리후디호가 붕고국에 표착하여 세계정세에 밝은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를 외교고문으로 앉혔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신교 신흥 강국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무역상시관을 히라도에 개설한다. 이에야스는 남만 무역에 대한 이익 추구 정책을 더욱 확장시켜 스페인과의 교역을 위한 국제무역항 우라가를 개항한다. 이는 그동안 사()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던 규슈지방 다이묘들의 세력약화와 대외무역을 독점하던 포르투갈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이에야스 정권의 기반강화에 큰 힘을 실어준 결정이었다고 하겠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종교보다는 무역 실리를 우선했으므로, 종교와 무역의 분리를 원했던 이에야스로서는 포르투갈보다 상대하기 좋은 나라였다. 1580년 스페인이 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정권의 거점인 에도와 가까운 우라가를 국제항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이에야스의 금교정책 속의 묵인과 관용으로 1599년에는 에도에 교회가 설립되며 교세는 센다이(仙台)로까지 확장된다. 1601년에는 파괴되었던 나가사키 교회가 재건되고, 나가사키 주변의 오무라, 아리마, 아사쿠사까지 교세가 되살아나고, 세미나리오에는 100여명의 상류층 자제가 공부하게 된다. 1606년 무렵까지도 유키나가의 옛 가신이었던 기독교 신자 200여명이 영주 아사노 나가마사의 보호하에 있었으며, 1607년 예수회 책임사제가 에도 신자들을 순회했다. 히데요시 사후 15992월부터 약 9개월간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가 4만 명에 이르렀으며, 전국의 신자 수는 75만이라는 최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1608노사 세뇨라 더 그라사호 사건이 발생하여, 1609년부터 1612년까지 이어지는 오가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촉발시키며, 결국에는 1613년 바테렌 추방령의 공포로까지 이어진다.
 
[1613년 그리스도교 금교령은 (1) 일본은 신국, 불교국, 유교국이다, (2) 기독교는 일본의 국법과 신도(神道)와 정법(正法)을 해치는 사교이므로 조속히 추방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라사호 사건은, 16095월 일본 항해 사령관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내항한 페소아가 일본 정부군의 공격으로 자결한 사건이다. 오가모토 다이하치 사건은, 하루노부가 그라사호 격침의 공적을 빌어 옛 영지 회복의 주선을 부탁한 다이하치와의 뇌물수수가 발단이 되었다. 1612년 다이하치는 화형에 처해지고 하루노부에게는 영지몰수와 함께 할복을 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켜 1612321일 이에야스는 막부 직할지에 기독교 금지령을 발포하고 기독교 다이묘에게는 영지몰수와 유배라는 엄벌을 내리며, 총애하던 오타 쥬리아도 이즈 오시마로 유배를 보낸다.
 
이에야스는 1613219일 금교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바테렌 추방문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이후 금교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16149월에는 기독교 다이묘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콘을 비롯한 다이묘와선교사, 일본인 신자 등 400여명을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고, 국내에 남아있던 일본 기리시단 신자 71명도 유형 및 처형했으며 나가사키에 남아있던 교회 11개를 모두 파괴한다.
 
이와 같은 금교와 탄압의 배경에는 무역에 따른 실리보다도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포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전국시대의 막강한 불교세력의 폐해를 목격한 이에야스로서는 종교적 신념 집단의 정치세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몸소 체험했기에 관대하기까지 했던 암묵적 금교 정책을 절대적 탄압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면서 16세기에 빈발하여 오다 노무나가를 괴롭혔던 일향종(진종)의 민중봉기인 잇코잇키’(一向一揆) 및 일련종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의 조직적인 항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다시 상기했음에 틀림없다.]
 
이에야스의 사후, 막부는 신도와 불교 등의 모든 종교 세력과, 무역 통제권을 막부산하에 두는 정책을 추진하며, 배교하지 않는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한치의 용서도 없는 혹독한 금교정책을 이어간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 270년간 지속되었다.
 
[참고] 육근화,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전래와 수용 양상 초기 기독교를 중심으로-”, 일본문화학보88, 2021. ; 박규태, “일본의 종교와 종교정책”, 종교연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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