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목요일

스왈른(Swallen, William Leander, 1859-1954)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스왈른, Swallen, William Leander, 1859-1954

 
스왈른, Swallen, William Leander, 소안론(蘇安論) 1859.3.24.-1954.5.8.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신학자.
 

1859
 
  • 1859324일 미국 오하이오주 캐롤카운티 맬번(Malvern)에서 스위스 이민 1세대 부모의 9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농사를 짓던 부모는 부요하지 않았지만 경건한 신앙으로 자녀를 길렀다.
 
1889
 
  • 오하이오 에이다(Ada) 사범학교(후의 오하이오노던대학)를 졸업한 후 여름에는 농장 일을 하고 겨울에는 교사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1889년 우스터대학을 졸업했다.
 
1892
 
  • 1892년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함께 선교사로 사역한 무어(S. F. Moore)와 리(G. Lee), 테이트(L. B. Tate)가 매코믹신학교 동창이었다. 스왈른은 신학교 시절 학교를 방문한 한국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강연을 듣고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
  •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그해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을 졸업한 사라 윌리슨(Sarah Willison, 1863.8.16.-1945.12.31.)과 결혼한 후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8921115일 내한하였다. 서울에 도착해서 매코믹 동창 무어(모삼열)의 곤당골 학당 건물에 살면서 어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893
 
  • 18931월 마펫, 리와 함께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을 받아 그해 여름 셋이 한석진의 안내로 평양을 방문한 후 돌아오는 길에 황해도 소래교회를 다녀왔다.
 
1894
 
  • 18942월 게일과 함께 원산선교부 개척자로 파송되었다. 게일은 1년 앞서 원산에 거처를 마련하고 성경 번역과 영한사전 편찬에 몰두하고 있었다. 스왈른은 원산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사 전군보와 함께 전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7월 청일전쟁이 터져 가족을 데리고 일본 나가사키로 피신하여 그곳 네덜란드개혁교회 선교부 학교 사역을 도와주었다.
 
1895
 
  • 1895년 봄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년 전 마펫과 평양을 방문했을 때 돌을 던졌던 이기풍을 원산에서 만나 그를 집안 요리사로 채용하고 세례를 준 후 조사로 삼아 전도사역에 동참시켰다. 원산에서 김용보ㆍ송창운ㆍ김수억 등 교인들이 생겨나 명석동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1896
 
  • 1896년 전군보ㆍ이기풍과 함께 함경도 관찰부가 있는 함흥에 가서 전도하였다. 함흥 주민들은 한복을 입고 단발한 스왈른을 단소선달’(但蘇先達)이라 불렀다. ‘선달은 당시 단발한 구한국 부대 장병들을 비하한 칭호였다. 함흥에서 어렵게 얻은 교인 신창희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수구파 함흥면장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집을 훼파하며 위협했다. 이에 스왈른이 관찰사를 찾아가 항의함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원산과 함흥에 교회를 설립한 후 북으로 북청ㆍ홍원ㆍ단천ㆍ갑산ㆍ이원ㆍ차호, 남으로 동해안을 따라 속초ㆍ강릉ㆍ삼척을 거쳐 경상도 울진까지 왕래하며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런 중에 원산에서 독립 선교사 신분으로 원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캐나다 출신의 펜윅ㆍ하디, 미감리회 의료선교사 맥길 등과도 협력하였다.
 
1899
 
  • 1898년 이후 그리어슨ㆍ푸트ㆍ매컬리 등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원산에 진출하였다. 이에 북장로회는 함경도 지역 선교를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넘겨주고 원산선교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 이에 따라 스왈른은 함경도 지역 15개 교회와 교인들을 캐나다장로회선교부에 넘겨주고 18994월 평양으로 옮겨 서문안 경창리 언덕의 옛 관청 건물에 입주하였다. 당시 평양선교부에는 마펫ㆍ베어드ㆍ리ㆍ휘트모어ㆍ헌트ㆍ웰즈ㆍ샤록스ㆍ베스트 등 일곱 가족이 있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전체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스왈른은 안악을 중심으로 황해도 북서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원산에서 동행한 이기풍 외에 신천에서 새로 얻은 김익두를 조사로 삼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1900
 
  • 1900년 선교보고에 의하면 스왈른 구역에 24개 교회, 세례교인 433, 학습인 288명을 기록했고 1년간 11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99명을 학습인으로 받았다. 성경공부와 사경회를 13회 실시하였는데 189911월 안악에서 실시한 사경회에는 25명이 참석하였다. 지방 순회 외에 평양에서는 베어드의 숭실학당 사역에 참여하였다. 숭실학당 학생들에게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고 미국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에서 1,800원을 학교 강당 건축기금으로 내놓았다.
 
1901
 
  • 1901년 선교사와 토착 목회자들과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공의회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1) 흉년을 향한 김포ㆍ통친ㆍ배천ㆍ연안 등지 교회를 위해 헌금하고, 2) 신학생을 택하여 신학교를 시작하고, 3) 서울과 평양ㆍ전라ㆍ경상 지역에 대리회를 설치하여 노회 설립을 준비하고, 4) 교회 부속 중학교와 소학교를 위해 주일 헌금을 실시하고, 5) 장로교회 신문을 공의회에서 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1903
 
  • 1903년 평양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남문밖교회 초대 담임자가 되었다. 처음엔 장대현교회가 처음 예배를 드렸던 대동문 안 널다리골예배당에서 모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예배당 건물을 차출하여 집회가 어렵게 되자 남문 밖 유진리에 스왈른 기금 500원으로 부지를 마련하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33칸 한옥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남문밖교회는 예배당 건축 후 교인이 급속도로 늘어나 1907600명을 기록하였다.
  • 1903년 이후 남문밖교회와 평양서면 시찰을 순회하면서 숭실학당과 신학교 강의를 계속하였다. 연합공의회 결의에 따라 미국 북장로회ㆍ남장로회ㆍ캐나다장로회ㆍ호주장로회 등 4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19031월부터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스왈른은 구약 역사와 성경지리, 도덕학(기독교 윤리),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칼빈주의 개혁교회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초교파 선교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5
 
  • 1905년 장로회와 감리회 6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가 결성되고 한국에서 단일 개신교회 설립 운동이 추진될 때 스왈른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교리와 신조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장로회와 감리회 사이의 선교구역 분할협정에 북장로회 대표로 참여하였고 미감리회 평양선교부를 대표하는 무어(문요한)과 함께 평안남도 지역을 함께 순방하며 선교 협력을 모색했다.
 
1906
 
  • 러일전쟁 후 황해도지역 교회가 부흥하여 1906년 재령선교부가 설치되어 황해도 일대 선교를 담당하게 됨에 따라 스왈른은 안악 지역을 재령선교부에 넘겨주고 이후 대동ㆍ강서ㆍ용강ㆍ진남포ㆍ태평 등 평양서면 시찰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그동안 마펫과 헌트가 담당했던 곳으로 처음 물려받을 때 40여 교회에 3천여 명 교인이었으나 10년 만에 60여 교회 6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1922년 이 지역 교회들만으로 평서노회가 조직되었다.
 
1907
 
  • 1907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 연합사경회가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하였을 때 스왈른도 그 현장에서 평양 교인들의 통회자복과 회개운동을 목격했다. 평양부흥회 후 그는 광주로 가서 부흥운동의 불씨를 전남 지역에 전파하였다.
  • 1907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 때 그의 선교구역에서 목회하던 송린서와 방기창이 졸업하였고 이들은 그해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로회 조직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 최초 목사로 안수받았다.
 
1909
 
  • 남문밖교회가 부흥하여 1909년 대동군 고평면에 명촌교회를 분립할 때에도 스왈른이 부지를 구입해 주고 교인들이 건축하였다. 이후 스왈른은 남문밖교회를 담임하며 평양 서부, 황해도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 1909-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스왈른은 1909년 가을 세 달 동안 평양서면 시찰에서 성인 619, 아동 5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남문밖교회 교인들은 날연보로 840일을 헌납하였으며 쪽복음 26,427부를 보급하였다.
 
1910
 
  • 19103The Korea Mission Field교회들이 깨어나고 있다. 많은 교회가 백만명구령운도에 집중하고 있다. 지방의 한 작은 교회 교인들은 12개월을 전도 일에 바치기로 작정했고 다른 교회는 6월을 헌납했다. 지난 가을 열린 제직사경회는 내가 본 모임 중 처음 보았다. 모든 교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남에게 전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썼다.
  • 스왈른은 백만명구령운동 강사로 원산에도 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19107월에는 스왈른 부부가 매큔과 함께 의주로 가서 2천 명이 참석한 사경회를 인도하여 새 신자 190명을 얻었다. 스왈른은 1910-1911년 보고에서 평양서면 시찰 내 49개 교회에 세례교인 3,755, 학습인 2,446명을 기록했고 1년 동안 세례 778, 학습인 1,173명 증가하였다고 밝혔다.
 
1912
 
  • 19124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가족과 함께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모교인 우스터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123월 평양에 돌아왔다. 그 사이 평양에서는 105인사건으로 평양지역 다수 교회지도자들이 서울 경무총감부에 압송되어 고문과 악형을 받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찰당국은 기독교인들이 다수 연루된 이 사건의 배후에 선교사가 있다고 보고 매큔ㆍ베어드ㆍ스왈른 등을 감시하였다.
 
1913
 
  • 남문밖교회 목회를 돕던 이일영이 1913년 평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자 그에게 당회장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사경회 인도와 신학 교육, 저술 활동에 집중하였다. 스왈른은 평양뿐 아니라 선천ㆍ전주ㆍ군산 등 다른 지방 사경회 강사로 초청을 받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도 계속 교회사와 도덕학, 성경역사와 성경지리를 강의하였다.
 
1914
 
  • 스왈른은 19144월 KMF에 발표한 복음전도와 자급원칙이란 논문에서 신생교회(토착교회)의 자립원칙은 성경적이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라고 설명하며 네비어스의 자원전도와 자립운동ㆍ자치운영 등 3자 원칙을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1915
 
  • 19158월 맏딸 올리벳(1893-1975)2세 선교사로 내한해서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사역을 시작한 것도 스왈른 부부에게 보람을 안겨주었다.
 
1917
 
  • 19171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소안론 박사 선교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마펫이 그의 선교 약사를 발표하였다.
 
1919
 
  • 1919년 평양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다.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를 비롯하여 남문밖교회 이일영 목사 등 많은 교회자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투옥되었을 뿐 아니라 스왈른이 관리하고 있던 평양서면 시찰의 강서군 모락장ㆍ원장ㆍ반석의 교회와 교회 부속 학교들 일본군 방화로 소실되고 만세시위 현장에서 살해된 교인들도 나왔다. 스왈른은 19196월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개인보고서에서 시찰 회원 8명 가운데 5명이 감옥에 있고... 58개 교회 가운데 7개 교회는 3개월 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했고... 잡혀서 구속되거나 지역이나 태형을 받은 자가 53명이다. 나이 든 집사는 고문으로 쓰러져 감옥 안에서 숨졌고 모락에서는 교인 4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두 명은 거기서 입은 총상으로 숨졌고 3명은 아직 병원에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을 팔과 다리 하나씩 잃었다고 밝혔다.
  • 191911월 자녀 교육 문제로 부인이 먼저 귀국하였다.
 
1920
 
  • 스왈른은 19208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1921
 
  • 19219월 부부가 함께 돌아왔다.
 
1922
 
  • 19221월 평남노회가 평양ㆍ안주ㆍ평서 등 3개 노회로 분할되었다. 이에 따라 스왈른 평서노회 소속으로 교회 목회는 한국인 목회자들에게 넘기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평양남자성경학원, 숭실대학교 강의와 사경회 인도, 번역과 집필에 전념하였다.
 
1927
 
  • 1927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1929
 
  • 1929년 둘째 딸 거트루드(1897-1981)가 우스터대학과 무디성경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선교를 지원한 보켈(H. Voelkel)과 결혼하고 내한해서 경북 안동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32
 
  • 19323월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710일 황해도 소래수양관에서 개최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 중에 외손자 윌리엄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 1932121일 평서노회 주최로 강서군 잉차면 청산포교회에서 소안론 박사 선교 4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1934
 
  • 1934-1935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와 평양선교부에 머물러 집필을 계속하여 베드로전기사복음종합 예수 일대기, 게시록대요, 다니엘요해등을 간행했다.
 
1939
 
  • 1939324일에는 북장로회 평양선교부에서 ‘80세 생일축하연을 베풀어주었다.
 
1940
 
  • 스왈른 부부는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했지만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194011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정부가 보내온 수송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후 오하이오 얼라이언스, 뉴욕을 거쳐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스버그에 거주하였다.
 
1954
 
  • 1954595세로 별세하여 9년 앞서 별세한 부인의 묘소가 있는 세이트피터스버그의 메모리얼파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편찬위원회,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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