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델, Ridel, Félix Clair, 1830-1884】
리델, 펠릭스 클래르(Ridel, Félix Clair, 1830-1884).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제6대 조선교구장(1869-1884). 한국명은 이복명(李福明).
【1830년】
- 1830년 7월 7일 프랑스 낭트(Nantes) 교구의 상트내(Chantenay) 소읍에서 4남매 중 남매로 태어났다.
【1857년】
- 1857년 12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보좌 신부를 역임하였다.
【1859년】
- 1859년 8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60년】
-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어 1860년 7월 27일 칼레(Calais, 姜) 신부와 함께 마르세이유항을 출발, 8월 28일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당도하였다. 조선 신학생 2명(金 요한, 林 빈첸시오)을 만나본 리델 신부는, 9월 초순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에 도착하여 조안노(Joanno, 吳) 신부와 페낭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이 바울리노와 합류했다.
- 같은 해 12월 19일 일행은 상해를 출발하여 24일 산동반도 체푸(芝罘, 지금의 煙台)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랑드르(Landre, 洪) 신부와 합류하였다.
【1861년】
- 1861년 3월 11일 리델을 비롯하여 칼래, 조안노, 랑드르 등 조선 선교사 4명과 신학생 이 바울리노는 체푸를 출발하여 위해(威海)를 거쳐 4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 조선교구 제4대 교장 베르뇌 주교와 부교구장 다블뤼 주교와 보름 동안을 함께 지내고 서울에서 400리 떨어진 반자리로 옮겨 11월까지 우리말을 익혔다.
【1862년】
- 그 후 진밭(충남 공주군 寺谷面 新)永에里 거처를 정하고 경상도를 순회한 데 이어 1862년 봄에는 내포 지방을 순회하였다.
【1863년】
- 1863년 4월 13일 둠벙이(공주군 新下面 造平里)에서 조안노 신부의 임종을 돌보았다.
- 또 랑드르 신부가 그 해 9월 14일 황무실(충남 예산군 古德面 好音里)에서 병사하자 이튿날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다블뤼 보좌 주교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1864년】
- 1864년 8월 말에 리델 신부가 간헐열(間歇熱)에 걸리자 다블뤼 보좌 주교는 문병을 와서 함께 연례 피정을 하였고,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10월 12일부터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러 공소들을 순방하였다.
【1866년】
- 1866년의 병인박해로 2월 23일 서울에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26일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27일에는 볼리외 신부가 산답리(성남시 雲中洞)에서, 같은 날 도리 신부가 손골(용인군 水枝面 東川里 上蓀谷)에서, 3월 2일에는 배론에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1일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더리에서 붙잡히고, 3월 12일에는 인근에 있던 위앵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가 자수하여 모두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 리델 신부는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교 활동을 중단하고 진밭 거처에 들렀다가 3월 12일 밤에 그곳을 떠나 인근 교우 집에서 숨어 지냈다.
- 5월 8일 페롱 신부가 그곳에서 70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리델 신부는 연락을 취하여, 5월 18일 중간 지점 교우촌인 공주군 신풍면 선학리 버시니에서 그를 극적으로 만났다. 그들은 여기서 함께 숨어 지내다가 6월 24일 충남 아산군 송악면 마곡리 방아사골 교우촌으로 옮겨가 닷새를 보낸 다음 6월 29일 작별하였다.
- 1866년 7월 1일 조선 뱃사공 11명을 데리고 신창 용당리를 출발하여 7월 7일 산동반도 체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는, 곧장 천진으로 가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실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체푸로 돌아와서 8월 중순 조선 뱃사공 8명을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고 3명만 데리고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 대표부로 가서 휴식을 취하던 중, 로즈 제독을 만나기 위해 조선인 3명과 함께 9월 7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일 체푸에 입항하였다. 그리고 9월 20~30일 사이에 리델 신부 자신은 통역으로, 조선 뱃사공 3명(崔善一, 崔仁瑞, 沈順汝)은 뱃길 안내원으로 프랑스 함대 3척에 승선하여 인천 앞바다, 강화도, 마포 양화진의 수심을 탐사하였다.
- 리델 신부와 조선 뱃사공 3명은 1866년 10월 병인양요 때도 동승하였다가 상해로 돌아올 때 조선 교우 7명을 더 데려왔는데, 이후 그는 상해, 산동반도, 요동반도, 일본 등지에서 조선에 밀입국하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다.
【1869년】
- 1869년 4월 27일 교황 비오 9세는 리델을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주교직을 사양하였다.
- 1869년 리델과 블랑 신부는 5월 28일 요동반도 차쿠에 있는 성모 설지전 성당을 떠나, 해양도를 거쳐 6월 9일 황해도 은율 앞바다에 있는 초도 근처에 당도하여 여러 번 정박소를 바꾸면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15일 교우들과 만나기로 된 초도를 떠나 18일 차쿠의 성모 설지전 성당으로 되돌아갔다.
【1870년】
- 1870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로마의 예수회 성당에서 본쇼즈 추기경, 초대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 일본 교구장 프티장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871년】
- 1871년 6월 27일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 대표부에 도착한 리델 주교는, 이튿날 뜻밖에도 미국 군함 편으로 상해에 온 조선 교우 9명을 만나 조선교회의 실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 9명은 1872년 5월 조선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들 가운데 신심 깊은 최지혁(崔智爀, 요한) 노인은 리델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 교회의 실정을 샅샅이 살펴보고 1875년 1월 중순 성모 설지전 성당에 있던 조선 선교사들에게로 와서 보고하였다.
【1875년】
- 1875년 9월 말 리델 주교는 블랑 신부와 함께 초도 근처까지 가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만나기로 한 조선 배를 만나지 못해 다시 차쿠로 돌아갔다.
【1876년】
- 1876년 4월 29일에 리델 주교는 블랑 신부, 드게트 신부와 함께 차쿠를 떠나 5월 8일 황해도 은율 앞바다 초도에서 마중 나온 조선 교우들을 통해 두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고 자신은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진력하고자 차쿠로 되돌아갔다.
【1877년】
- 1877년 9월 11일 리델 주교는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데리고 차쿠를 떠나 태장하 항구를 거쳐 23일 황해도 장산곶에 무사히 상륙하였다. 1866년 7월 1일 조선에서 탈출한 지 11년 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1878년】
- 1878년 1월 28일 리델 주교는 서울 자택에서 붙잡혔다.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중국 정부가 개입한 덕분에 6월 11일 서울을 떠나 파주, 개성, 봉산, 중화, 평양, 안주, 정주, 곽산,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다음 6월 24일 저녁때 변문에 당도한 리델 주교는, 다음날 6월 30일 봉천에 도착하여 본당 신부 슈발리에에게 인계됨으로써 자유의 몸이 되었다.
【1880년】
리델 주교는 중국에 도착한 후 장차 조선에 입국하게 될 선교사들을 위해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 가운데 《한불자전》은 1880년 요코하마의 레비(Lévy) 인쇄소에서 출판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조선어 문법서인 《한어문전》도 같은 곳에서 출판되었다.
【1881년】
- 이 무렵 그는 요동반도 차쿠에 있는 조선 진출 거점을 일본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뜻밖에도 1881년 10월 5일 나가사키 주교관에서 발병한 뇌일혈로 반신 불수가 되어 나가사키, 상해, 홍콩 등에서 요양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이듬해 블랑 신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1884년】
- 귀국한 리델 주교는 반느(Vannes)에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두 차례 루르르 순례 방문으로 치유를 빌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884년 6월 20일 54세로 사망하였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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