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요일

배론 성 요셉 신학교

배론 성 요셉 신학교

 
[배론]
 
배론(舟論).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요, 최양업 신부의 무덤이 있는 천주교회 사적지로, 1801년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한 곳이었고, 1855년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원주교구 관할 지역인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九鶴里) 소재. 배론이란 명칭은 골짜기의 형상이 뱃바닥 같다는 데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八松亭) 도점촌(陶店村)이며,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배론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이들은 주로 옹기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은 김한빈(金漢彬, 베드로)과 함께 그해 2월 보름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과 강원도를 거쳐 그달 말에 배론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黃沁, 토마스)도 배론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신자 김귀동(金貴同)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 등이 전해 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백서를 북경에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玉千禧, 요한)8월 무렵에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봉황성 책문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밀고로 915(1022)에는 황심이 체포되었다. 929일에는 황사영과 김한빈이 배론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집주인 김귀동도 체포되었다. 그 결과 백서는 포졸들에게 압수되었고,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경기도 수원 출신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843년에 배론에 정착하게 되었고, 1855년 초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메스트르(Maistre, ) 신부가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한국 교회 안에서 최초로 격식을 갖추어 설립된 신학교였다. 이때 베스트르 신부는 장주기로 하여금 3명의 첫 입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이듬해 3월에 푸르티에(Pourthié, )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1856815일에 배론에 도착하였다.
 
설립 직후 신학교 학생수는 6명으로 늘어났고, 4년 후인 1859년 말에는 다시 7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페낭 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던 3명의 신학생들 중에서 1861년에 1, 1863년에 2명이 귀국하여 모두 배론 신학교로 편입함으로써 학생수가 10명에 이르렀다가 1명이 환속하여 9명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신학교에서는 1861년부터 기존의 라틴어과와 함께 신학과를 새로 개설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 신부가 휴양을 겸해 라틴어과 교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도착하였다. 이어 신학교에서는 1864년 말에 처음으로 서품식을 갖고 2명에게 삭발례와 소품을 주었으며 장주기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그를 대신하여 이강주(李康柱, 빈첸시오)에게 한문 강의를 맡겼다.
 
한편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사목 방문 도중에 가끔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고, 푸르티에 신부나 신학생들과 어울려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861615일에 사목 방문 결과를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하러 가던 중 문경의 한 교우촌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에는 푸르티에 교장 신부의 주관 아래 배론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해의 여파가 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186632일이었다. 이날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장주기를 체포한 데 이어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는데,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자 장주기는 석방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하루 동안 신문을 당한 뒤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고 311(125)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장주기는 다시 체포되어 제천 관아에 투옥되었는데, 여기에서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고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으로 이송되어 330일에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배론 성 요셉 신학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학교이자 한국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교육 과정을 개설한 곳. 1855년 초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설립되었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페쇄되었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성 요셉 신학교였으나, 그 소재지가 배론 교우촌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배론 성 요셉 신학교라 불린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신학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31년에 조선교수가 설정되고,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파견된 곳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지의 신자를 성직자로 양성하여 선교사들이 이룩한 교회를 하루빨리 현지인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창립 정신의 하나로 정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즉시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1836113일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그 해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으며, 1837년에 입국한 앵배르 주교도 신학생을 4명 선발하여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때 정식으로 신학교가 설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 교육마저도 1839년 기해박해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러다가 1850년 무렵에 페레올 주교가 다시 5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개인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하였으며, 1854년에는 메스트르 신부가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페낭으로 신학생들을 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를 무릅쓰고라도 조선 안에서 신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1853년 이래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게 된 메스트르 신부는 1855년 초에 이르러 마침내 제천의 배론 교우촌에 교육 목적이나 교육 내용이 분명하고, 건물과 교육 과정을 갖춘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 요셉 신학교, 그 이름은 메스트르 신부의 세례명인 요셉을 따서 붙였던 것 같다. 또 이 무렵에는 다블뤼 신부도 하나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있었는데, 이 신학교는 어떤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블뤼 신부 개인에 매여 있었으므로 그 후 폐지되고 말았다.
 
성 요셉 신학교 교사는 장주기가 제공한 3칸짜리 초가 살림집이었다. 그는 1843년경부터 배론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신학교 설립 후에는 학생들에게 한문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건물은 푸르티에 교장 신부가 사용하는 숙소 겸 성당인 1칸짜리 방과 교실 겸 기숙사로 쓰이는 2칸짜리 방에 불과하였으므로 환경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성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교사 신부나 학생들 모두가 이를 우려하였고, 또 모두가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1863년부터 다블뤼 주교와 함께 다른 곳으로 신학교를 옮겨보려고 하였지만, 적당한 장소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신학교의 교육 과정은 푸르티에 교장 신부가 부임하는 1856815일 이후에 마련되었다. 신학교에 신학과(상급반)가 개설된 것은 페낭 유학생 1명이 귀국하던 1861년 이후였다. 배론 신학교에서의 교육은 과거 여러 선교사들이 임시 거처에서 해오던 교육을 좀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학생들은 마음놓고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서양의 근대적인 학문과 문물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교육 과정인 라틴어와 철학ㆍ신학을 학습하게 되었다. 또 학교의 규모는 비록 소규모였을지라도 그 교육 내용만은 한국 땅에 개설된 최초의 근대적인 교육 과정이었다.
 
성 요셉 신학교는 꾸준한 발전을 보이다가 병인박해로 인해 186632일에 폐쇄되었다. 이날 서울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푸르티에 신부는 폐병으로 객혈을 하는 상태였다. 이에 앞서 체포되었던 장주기는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풀려 나도록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1866311(1250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330일에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 중 박만억(필립보)은 박해 때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던 거더리(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上宮里) 공소로 포졸들을 이끌고 왔다가 석방되었는데, 그는 1868덕산 굴총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자들과 함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편지를 오페르트(Oppert)에게 전한적이 있었다. 또 권동(權童, 요한)은 수원에서 훈장 생활을 하다가 18712월에, 유 안드레아와 김 요한은 1868년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그 결과 배론 신학교는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고, 그 동안에 이루어 온 10년 간의 노력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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