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요한 몬테 코르비노, Johannes de Corvino, 1247-1328

요한 몬테 코르비노, Johannes de Corvino, 1247-1328

 
초대 북경대교구장이자 몽골 통치하의 극동 전 지역 관할 총대주교. 작은 형제회 회원. 한자 이름은 맹고미락(孟高味諾). 중국 원나라 때 북경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한 선교사로서, 북경에 최초의 가톨릭 성당을 건축하였다.
 
요한은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몬테 코르비노라는 마을에서 1247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해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작은 형제회의 신부인 마리뇰리의 요한(Johannes de Marignolli)에 의해 알려진 것이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요한이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군인, 법률가, 의사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부유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가 수도원에 입회한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요한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고, 철학과 신학을 배운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신학 강의와 설교에 충실하였다. 그는 대단히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프란치스코의 덕과 영성을 본받으려는 열성이 남달랐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점차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선교를 하려는 소망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장상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선교사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요한은 생애의 거의 전부를 선교 활동에 바쳤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선교 활동에 관한 세 편의 서한을 남겼다. 그의 50여 년(1279-1328)에 걸친 선교 활동은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1시기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체험한 시기이다. 그리고 북경을 향한 여정 중에 13개월 간인도에 체류한 시기이다(1279-1293). 2시기는 원나라 수도인 북경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북경대교구장이자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로임명되기까지의 시기이다(1294-1307). 3시기는 총대주교로 서임된 후, 북경 관구의 관할 교구들을 설립하고 정비하다가 사망할 때까지의 선교 활동 시기이다(1308-1328).
 
[1시기]
 
요한은 중동 지역선교지에서 약 10년 동안 열정을 다해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요한은 아르메니아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또 네스토리우스주의 전례에 사용되는 문어체 시리아어로 습득하였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와 그루지아의 동방 교회와 접촉하여 그들의 관습과 심성, 그리고 정치적ㆍ사회적 권력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 습득과 문화적인 겸험들은 후에 그가 황실의 막강한 힘과 보호 아래 경교가 압도적으로 성행하고 있던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2세는 매우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으로서, 많은 왕족과 백성들과 함께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왕은 1289년에 교황 니콜라오 4(1288-1292)에게 평화의 사절로 요한을 파견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요한에게 아르메니아의 헤툼 2, 안티오키아와 그루지아의 총대주교, 페르시아의 칸 아르군과 에티오피아의 왕, 그루지아의 왕에게 보내는 서한들과 그 외에 선교 사명을 부여하였다. 즉 교황은 그를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1260-1294)에게 교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요한은 1290-1291년 사이에 교황의 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먼 여행을 떠났다.
 
요한은 1291년에 도미니코회의 니콜라오와 마침 타브리즈에 온 이탈리아의 상인 베드로와 함께 먼저 인도로 항하였다. 일행은 1292년 혹은 1293년경에 인도에 도착하여 약 13개월 간 그곳의 성 토마스 성당에 머물렀다. 요한은 인도에 도착한 후, 인도의 문화와 기후, 그리고 인도에서의 어려운 생활 등을 보고하는 첫 번째 편지를 이탈리아어로 썼다. (이 시기에 그의 동료 니콜라오가 사망하였다)
 
[2시기]
 
요한은 1294년경에 상인 베드로와 함께 배를 타고 해로로 북중국의 칸발리크(지금의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요한이 북경에 도착했을 무렵은 황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난 직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그는 쿠빌라이의 후계자 티무르(Timur, , 1294-1307)에게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쿠빌라이에게 보낸 교황의 1289713일자 칙서를 티무르에게 전하였다. 요한은, 로마 교회와 라틴 세계를 관대하게 받아줄 것을 청하는 교황의 서한을 전하면서, 가톨릭의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하지만 요한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너무 오랫동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고 있었다.
 
요한은 특히 중국 선교 활동을 전개할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페르시아에 체류하고 있는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의 장상들과 작은 형제회 총장에게 보낸 라틴어로 편지에서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요한은 산서 북부의 몽골 부족인 옹구트의 왕 제오르지오(티무르 황제의 사위)와 만났고, 그는 경교 신자였으나 요한에 의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옹구트의 왕은 거액을 들여서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 북부 산서 방향으로 20여 일 가는 지점에, 삼위일체 하느님과 교황을 위해 봉헌한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주었다(성당은 1299년경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이 북경에 온 이후 혼자서 사목하느라 온갖 역경과 노고를 겪었다. 북경에서 사목 활동을 한 지 11년 만인 1303년에 쾰른의 작은 형제회 회원 아르놀도(Arnoldus Alamanus) 신부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르놀도는 온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요한의 편지에서 1305년에 황실 옆에 또 하나의 성당과 수도원 숙소 설립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타브리즈에서 함께 온 상인 베드로가 13058월 초에 부지를 사서 기증한 땅에, 후원금으로 주변 담장과 수도원 숙소와 제의실과 20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본당을 성 프란시츠코 축일(104)까지 완공하였다.
 
[3시기]
 
요한의 편지들은 타브리즈에 있는 토마스 주교가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로마에 전하였다. 토마스 주교는 추기원(Consistorium) 회의에 참석하여 추기경들 앞에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이 간절히 청하고 있는 바와 중국의 선교 활동은 계속 진전시킬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피력하였다.
 
교황 글레멘스 5(1305-1314)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 곤잘로(Gonzalo de Balboa, 1304-1313)에게 작은 형제회 회원 중에서 덕이 출중하고 복음 정신이 투철하며,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회원들을 선정하여 주교로 서임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특권을 부여하여 북경으로 파견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교황은 1307723일 북경을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좌로 설정하고, 총대주교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주교로 임명한 7명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1308년경에 북경으로 파견하여, 요한을 총대주교로 서임시키고 그를 보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 7명의 주교들 중에 4명이 도중에 사망하였고, 제라르도는 당나라 때부터의 항구도시인 천주에 남고, 안드레아와 페레그리노가 1313년경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후 1313년에 교황청에서는 추가로 세 명의 주교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베드로(Petrus de Florentia), 국적 불명의 토마스, 카파의 주교로 임명된 예로니모(Hieronymus de Catalaunia)였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만이 무사히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 관구 설정은 1318년까지 지속되었다. 북경 관구에는 북경대교구를 비롯하여 천주 즉 자이툰(Zaitun)ㆍ알말리흐(Almaligh)ㆍ카파(Kaffa)ㆍ사라이(Sarai)ㆍ타나(Tana)ㆍ쿠무크(Kumuk) 교구들이 설정되어 소속되었다.
 
요한은 1328년에 81세의 고령으로, 중국의 사도로서 복음화에 헌신하였던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그를 추모하는 장례식은 장엄하게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북경에 설립된 작은 형제회 수도원 내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식에 대하여 술탄의 총대주교인 코라의 요한(Johannes de Cora)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요한은 생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뿐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상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를 기억하며 공경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사망한 후에, 교황청은 계속해서 그의 후임자들을 임명하였다. 원나라가 패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북경대교구는 약 40년 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6세기말, 17세기에 예수회에 의해 중국 땅에서 다시금 복음이 선포되기까지 중국에서는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북경대교구도 폐지되었다가 청나라 때인 1690년에야 교구로 설정되었고, 1696년 이래 여러 교구로 분리되었다.
 
요한은 최초로 중국에 교회를 설립한 자이며,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과 복음이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한 사람이었다. 요한이 사망한 직후 14세기까지 중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펼친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요한만큼 커다란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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