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Franciscus Xaverius, 1506-1552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Franciscus Xaverius, 1506-1552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 성인. 축일은 123. 스페인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하비에르(Francisco de y Javier)이고 한자 이름은 방제각 사물(方濟各 沙勿)이다. 1534년에 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등과 함께 예수회를 창설하였는데 특히 인도와 극동 지역의 선교를 개척함으로써 인도 및 일본의 사도로도 불린다.
 

[출생과 서품]
 
150647, 스페인 북부 나바라 주() 인근에 위치한 하비에르(Javier) 성의 성주인 야수(Juan de Jassu)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볼로냐 대학의 법학 박사로 추밀원 의장을 역임하였고, 어머니는 그 지방의 귀족 출신이었다. 사베리오가 6세 되던 해 스페인 통일의 야심을 갖고 있던 카스틸랴(Castilla)가 나바라를 침공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버지 야수는 프랑스 편에 서서 이에 대항하다가 패하였으며, 그의 형들도 1524년에 자유 회복을 위한 전쟁에서 패하여 낙향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듬해부터 성직의 길을 택해 파리 생트 바브르(Sainte-Barbe)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526년에 그곳에서 사보야르와 파브르, 그리고 훗날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를 만났다.
 
1530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문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베리오는 파리 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강의하였다. 그후 1534815일에는 예수회의 초창기 회원인 이냐시오를 비롯하여 파브르, 라이네스, 살메온, 보바디야, 시몬 로드리게스 등과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치명자의 언덕인 몽마르트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평생 헌신할 것을 허원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회를 창설한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후 영신생활을 스스로 체험한 그는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37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로마에 도착하여 624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53993일에는 교황 바오로 3(1534-1549)에 의해 구두로 예수회가 인가되었다.
 
[선교활동] 

[인도와 말레이 반도]
 
교황에 의해 인도 교황 특사로 임명된 사베리오가 리스본을 떠나 희망봉을 돌아 동인도의 수도 고아에 도착한 것은 154256일이었다. 곧바로 사베리오는 당시 포르투갈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고아의 주교를 교황 특사 자격으로 알현한 뒤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고아에 도착한 후 7개월이 되었을 때 이냐시오 총장은 사베리오를 인도 남부 파라바스(Paravas)로 파견하였고, 이후 약 3년 간 그는 인도의 남동부 해안에서 파라바인들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특히 어린아이, 젊은이, 하인들, 어부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인근의 코친(Cochin)과 세일론(Ceylon) 섬에서 선교활동을 벌였으며, 트라방코레(Travancore)에서는 한달 동안에 1만 명이 넘은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1545년부터 사베리오는 말레이 반도에 있는 상업 중심지 말라카에써, 이듬해 초에는 몰루카 제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한편 이 무럽 그가 최초로 필리핀에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필리핀의 사도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증거는 희박하다.
 
1548년 이후에는 더 많은 예수회 수사들이 인도 선교를 위해 몰려들었다. 한편 예수회는 여러 해 전에 고아의 성신 대학을 인수하였는데, 사베리오 신부는 이 대학을 고아 교구를 위해 인도인 사제들과 교리 교사들을 양성하는 터전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교회로부터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평신도 유급 교리 교사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훗날 이 대학의 영향력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미치게 되었다.
 
[일본 선교]
 
1546년에 말라카에서 일본인 고아 야지로를 만나 교리를 가르친 후 이듬해 7성부의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준 사베리오는, 1549415일 야지로를 비롯하여 몰루카에서 만난 재속 사제 고스마 토레스와 코르도바의 후안 페르난데스 평수사 등과 함께 일본 선교를 목적으로 고아를 떠나 그해 815일 야지로의 고향인 규슈 남쪽 가고시마에 도착하였다. 그후 사베리오는 일본어를 배운 뒤 야지로와 함께 그곳 전교에 노력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규슈북쪽 섬인 히라도(平戶)에까지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이처럼 그가 첫 일본 선교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곳 영주들이 장차 있게 될 유럽과의 교역에서 상권을 얻고자 그를 환대한 데 있었다.
 
사베리오는 이후 1551년까지 약 2년 반 동안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야마구치(山口)를 비롯하여 교토, 분고(豊後) 등 혼슈(本州)의 서부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 동안 일본인들이 그를 천축승 또는 천축의 성주로 이해하게 되자 그는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교리를 전하였으며,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면서 영주와 무사들로부터 많은 환심을 얻게 되었다.
 
15513월에는 인도 태수 및 주교의 소개장과 진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전년에 방문한 적이 있던 야마구치의 오우치 요시타카를 다시 방문하여 환영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요토모 요시시게에게 분고로 초대받기도 하였다. 한편 야마구치에 있을 때 입교하여 천주교 수사가 된 라우렌시오는 훗날 일본 전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베리오는 1551년 말에 그곳에서 입교한 베르나로도와 마태오와 함께 인도로 건너갔는데, 베르나르도는 유럽 땅을 밟는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중국 선교]
 
일본을 떠나기에 앞서 사베리오는 그곳의 전교를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인도로 가던 도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 근처의 상치안(上川) 섬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코친에서 알고 지네던 페레이라(Diogo Pereira) 사절을 만나 중국 사정과 그곳에 억류되어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일본의 문화가 중국에서 건너간 사실을 알고는 중국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개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선교를 결심하였다.
 
고아로 돌아온 후 사베리오 신부는 예수회의 초대 인도 관구장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몇 가지 급한 문제들을 해결한 후에 그곳의 책임을 베르세(Kaspar Berse)에게 위임한 뒤 1552417일 중국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3명의 수행원과 함께 중국에 합법적으로 입국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이후 상치안 섬에 머무르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여러 차례 중국 내지로의 진출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기력이 쇠진하여 1552122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임시로 그곳에 묻혔다가 1553년 봄에 말라카로,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고아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사베리오는 극동의 첫 번째 선교사로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1542년 이래 106개월 동안 약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
 
사베리오는 사망한 지 67년 만인 1619년에 시복되었으며,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1621-1623)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었다. 1748년에는 희망봉에서부터 인도ㆍ중국ㆍ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 성인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교황 비호 11(1922-1939)에 의해 성녀 리지외의 테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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