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한국전쟁] ‘에버레디 작전’ : 이승만을 제거하라

이승만의 집요한 휴전 반대에 골머리를 앓던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1952부산 정치 파동시에 검토했던 이승만 제거 계획 문건을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으로 명명된 그 계획을 미 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가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195355일이었다. 아마도 이승만의 ‘4월 강공책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 이승만 같은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워싱턴과 유엔군 사령부에서 수많은 비밀 회의들이 열렸을 것이다. 그간 미국이 제3세계에 수많은 반공 정부를 세우고 지원하는 일을 해왔지만 이런 희한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도 했을 것이다. 여러 고려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529일 덜레스가 주도한 백악관회의에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이 회의는 아이젠하워에게 이승만이 원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건의하였다.

 

# 한미상호조약 협상을 시작할 것을 약속한 아이젠하워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530일자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답신으로 나온 66일자 아이젠하워 친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68포로교환에 관한 협정의 체결을 본 이승만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는 없었다... 휴전협정은 서명 절차만 남겨 놓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618일경이면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승만의 허세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 반공 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십수일 또는 수일 전부터 헌병 총사령관인 소장 원용덕을 불러 은밀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이 원용덕에게 내린 명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헌병들을 각 수용소로 나누어 파견했다. 이들은 미군 보초를 영창에 가두어 버리고 반공 포로 석방에 들어갔는데, 바로 618일 새벽 5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포로교환 심사 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것이다.

 

# 세계가 경악한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은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개탄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8년 대통령 재임 기간중 자다가 일어난 건 그때가 유일했다고 썼다. 그는 만약 일본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동맹국이 한국에서 발을 뺐을 거라고 일기에 썼다.

 

# 이승만에 대한 처칠의 비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이승만을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비밀리에 이승만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처칠의 비난에 대해 이승만은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이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처칠을 늙은이라고 비아냥댔지만 처칠은 이승만보다 겨우 4개월 연상이었다.

 

# 덜레스(미 국무장관), 클라크(유엔군사령관), 미국의 뉴욕타임스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등에 칼을 꽂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옥문이 열렸다고 말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지는 대재앙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에게 항의하기 위해 바로 그날로 동경에서 날아온 클라크에게 이승만은 내가 장군에게 미리 얘기해 주었다면 장군의 입장이 더 곤란했을 것 아니겠소라고 대답했다.

 

# 휴전협정 체결 지연 작전?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북한과 중국의 휴전회담 거부를 유도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지연 또는 파탄시키려는 계산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보수 언론을 대표하던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에 대해... 공산군측이 정말 휴전을 원한다면 포로 석방이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로 석방이 휴전을 막을 수 없다는 건 맞아떨어졌다. 공산군측은 정말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반공 포로를 석방한 바로 그 날에 열린 휴전회담에서 북한의 남일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경우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였다.

 

# 로버트슨의 이승만 평가

 

훗날 로버트슨은 이승만에 대해 교활하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장사꾼적 기질에 더하여 그의 나라를 국가적 자살 행위에 충분히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고도로 감정적이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광신도라고 말했다.

 

# 아이젠하워가 바라본 이승만

 

아이젠하워는 휴전조약이 맺어지기 며칠 전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과 남한 정부 둘 다 너무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이승만이 너무나 비협조적이었거나 고집을 부린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적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자이며, 그를 아무리 심한 말로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 이승만을 비판한 조병옥 : 테러, 연행, 수감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국내의 일부 우익 정치인들마저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병옥은 이승만이 유엔 정책에 반하는 지나친 행동을 했으며 외교상의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병옥을 규탄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조병옥은 급기야 심야에 테러까지 당했다. 그는 쇠뭉치로 머리를 맞아 실신하였다. 조병옥은 응급 치료를 받은 뒤 수원으로 피신했으나 625일에 연행되어 서대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약 한 달만인 720일에 풀려나긴 했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기억력을 거의 상실해 한때 폐인이 될 위기마저 겪었다.

 

당국은 조병옥을 육군형무소에 수감시켜 놓고 조사를 하면서 대통령 암살음모 사건까지 연계시키려 들었다. 조병옥의 표현을 빌면 가장 기괴한 일까지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 이승만식 반공주의

 

이승만식 반공주의... 반공에 관한 한 조병옥은 극우라 해도 좋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그런 인물도 이승만 정권에선 이승만에게 대들 경우 하루아침에 빨갱이나 용공세력으로 몰릴 수 있었다. 반공의 잣대가 오직 이승만이었던 것이다.

 

빨갱이를 잡는 사상 검사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선우종원도 장면의 비서실장을 지낸 것이 죄가 되어 부산 정치 파동시 완전히 날조된 혐의로 빨갱이로 몰렸다. 그는 억울하게 죽기 싫어 일본으로 밀항해 8년간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 이승만을 위한 반공주의는 매카시의 행태를 연상케 한다

 

이승만의 이런 이승만을 위한 반공주의는 바로 그때 미국에서 이승만 못지 않게 반공 투쟁을 벌이며 온 미국을 빨갱이 사냥의 사냥터로 몰아가던 매카시의 행태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매카시가 늘 부르짖던 미국을 위한 투쟁’(fight for America)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한 투쟁’(fight for Joe McCarthy)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쟁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았고 무책임한 도피를 일삼으면서 많은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 이후에도 매카시즘을 동원한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북진통일론은 그런 책임 문제를 흐리고 오히려 적반하장의 역전을 가능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서중석에 따르면,

 

이승만의 북진통일에의 군중 동원은 이승만을 통일의 사도 또는 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면이 있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북진통일운동을 통해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의 거대한 동원 속에서 군중심리가 나타나고 그것은 위기의식과 결합되는 바 이러한 군중심리와 위기의식은 반공정신의 강화, 반공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지향하며, 그것은 반공의 권화(權化)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반향되었다. 끊임없이 전시체제가 요구되는 속에서 동원체제가 가동될 때, 극우반공체제와 이승만 권력은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전쟁시의 처참한 동족상잔이 가져다 준 공포감과 암담함 속의 침묵 또는 굴종 위에 버티고 있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 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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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승부사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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