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

 
예수회 소속 동양 선교사. 한국 선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15931228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종군 신부로 파견되어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생애와 활동]
 
155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마드리드 시장과 치안관을 역임한 세스페데스 데 오비에도(Céspedes de Oviedo)와 도냐 마리아 데 시망카스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장성하여 살라망카 대학에서 문학과 교회법을 전공하였으며, 1569128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1571년 아빌라(Avila)에서 첫 서원을 하였으며 이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중 1574321일 동양 선교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인도 고아 관구 소속 순찰사가 된 발리냐노(A. Valignano) 신부를 따라 콘스탄티나 호에 승선한 뒤 리스본 항을 출발한 세스페데스 일행은 아프리카 모잠비크를 거쳐 그해 96,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 중심지이자 예수회 관구가 있던 고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고아 신학교에 편입하여 신학을 공부한 뒤 157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76년 일본 선교사로 임명되어 고아를 출발한 세스페데스 신부는 마카오에 체류하다가 이듬해 14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얼마 후 오무라(大村)에 거주하면서 일본어와 풍습을 익힌 후 곧바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지방 토호들의 간섭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자 157912월에는 교토로 이주하여 전교하였다. 그리고 1581년부터 천주교 신자 다이묘인 이케다(田丹後守)의 영지 야오성에 거주한 세스페데스 신부는, 그해 오사카 신학교 원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 그는 많은 일본 귀족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특히 그가 1583년에 세례를 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우구스티노)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584년에 다카츠키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어 오사카에 머무르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이듬해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문을 받았으며, 이 자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훗날 자신도 입교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천주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1579년부터 1587년까지 약 10년 동안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극동 지역에서의 복음 전파와 문화 사업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그러나 1587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일본에 있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림으로써 1588년에 세스페데스는 규슈의 아리마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 다이묘들과 친분관계를 돈독히 유지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정책이 날로 심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시마바라(島原), 미에(三會)를 비롯한 다카구(高來) 지역을 순회 전교하면서 교세 확장에 진력하였다. 1592년 아리마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1일에는 하치라오(八良尾)에서 종신 서원을 하였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예수회 준관구장 고메스 신부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종군 신부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해 1228일 한칸 레온(Hankan Leon) 수사와 함께 경상남도 웅천(熊川)에 도착한 세스페데스 신부는, 18954-5월까지 1년여 동안 조선에 머무르면서 성무 활동을 벌였으나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조선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만난 사람은 일본에 노예로 팔려간 전쟁 포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세스페데스의 조선 체류 사실은 1년 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알려졌고, 보복을 두려워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권유에 따라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대마도에 들러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자 도주(島主)의 부인인 마리아의 집에 잠시 머무르던 그는, 거기서 포로로 잡혀 온 두 명의 조선인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일본으로 데려가 빈첸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준 뒤 교리 교사로 양성하였다. 그러나 빈첸시오는 1626620일 나가사키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세스페데스는 1595년부터 1596년까지 아리마에 체류하였고, 이듬해 25일에는 나가사키에서 천주교 신자 26명의 순교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1600년에는 부젠(豊前) 지방에 있는 나카쓰(中津)라는 지역에서 체류하였고, 1602년에는 고쿠라(小倉)로 건너가 수도원을 설립한 뒤 수도원장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61세 때인 161112월에 뇌출혈로 사망하여 나가사키의 예수회 신학교에 묻혔다. 세스페데스 신부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가 매우 강인한 신체적 조건을 가졌고 높은 덕망으로 동료는 물론 이론 기리시단 다이묘들과 일반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방문의 의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세스페데스 신부는 16세기에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유럽인이자 유렵인으로서 임진왜란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1594년 예수회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세스페데스의 조선 방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가 기여한 바는 없다.
 
세스페데스의 방문으로 인하여 조선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된 유럽인들의 방문으로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세스페데스는 당시 조선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4통의 서간문으로 남겼는데, 이는 16세기 조선에 관한 최초의 직접적인 기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웅천 성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일본군 요새들과 기리시단 다이묘들에 관하여 기술하면서 전쟁보다는 평화를 갈망하는 뜻을 비추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세스페데스 신부를 비롯하여 조선을 방문한 유럽인들에 의해 조선의 올바른 모습이 기술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거북선의 우수성과 조선 문화의 수준이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본국 스페인 정부에서는 세스페데스 신부의 업적을 인정하여 1991년에 톨레도 지방의 비야누에바 데 알카르데테 시()에 세스페데스 문화 기념관을 설립하였으며, 조선 방문 400주년이었던 1993년에는 그가 첫 발을 내디뎠던 진해의 풍호 근린공원에 세스페데스 기념 조형물을 기증하기도 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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