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545-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트리엔트 공의회

 
루터와 여러 개혁가들은 보편 공의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초기의 교황들은 공의회 소집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일찍이 교황보다 종교회의가 우위임을 주장한 공의회 수위 운동의 부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분열이 항구화된 바울 3세의 재위 기간에 비로소 로마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각종 복잡하고 난해한 협상 끝에 공의회가 154512월 트렌트에 소집될 것이 결정되었다. 카를 5세가 자기 영토 내에서 회의를 개최할 것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의 황제 직할도시였던 트렌트가 회의 장소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1차 회기에 31, 마지막 회기에 213명이었다.
 

[클레멘트를 계승한 바울 3는 모호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보다 점성술을 더 의지하였으며, 그의 교황청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족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을 파르마와 피아렌차의 공작에 임명했고, 십대의 손자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그 역시 로마 시를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려 하였으므로 유럽 각국들로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금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도 개혁에 일익을 담당한 교황이었다.그는 제수잇을 공인하였으며, 이들을 이용하여 선교에 힘썼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대항하게 했다. 1536년 그는 개혁에 필요한 방책을 강구하기 위해 추기경들과 주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공의회들은 몇 가지 문제, 혹은 이단으로 고려된 교리 문제들만 다루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광범위하였으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므로 이 공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의문을 제기한 신학의 문제들을 취급해야 했다. 또한 교회의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칙령을 반포해야 했다. 또한 공의회는 통일성과 정통성을 연결시켜 교회 생활과 예배를 규제할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제19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간주하는 트렌트 공의회의 역사는 복잡하다. 교황 바울 3세와 황제의 관계가 미묘해졌을 때, 교황은 회의 장소를 교황령으로 옮겼다. 그러나 황제가 주교들에게 트렌트에 남아 있도록 명령하였으므로 회의는 1547년까지 정회되었다.
 
[1555년 카라파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어 바울 4에 취임하였다. 그는 바울 3세가 임명한 위원회의 회원이었는데,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그 위원회가 비난하였던 악덕들을 고쳐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엄격한 인물로서 개혁의 필요성을 모든 일에 있어서 엄격한 통일과 동일시했다. 그의 지도 아래 종교재판 활동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감독 하에 출판된 금서목록에는 가장 뛰어난 가톨릭 문학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바울 4세는 로마 교황청을 숙청하고 교황청을 가톨릭 개혁의 지도적 위치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방법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그의 정책은 여러 세대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회의는 1551년에 재개되어 다음 해에 다시 정회되었다. 1555년 바울 4세가 교황이 되었다. 그는 공의회가 시작한 개혁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스페인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재소집을 삼갔다. 마침내 1562년 다음 교황 피우스 4의 재위 중 회의가 다시 소집되어 1563년에 종료되었다. 이론상으로 볼 때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기간 대부분은 휴회 상태에 있었다.
 
개혁에 관한 문제들의 골자를 보면, 주교들에게 자기 교구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였고, 복수성직제-한 사람이 몇 개의 성직을 중임하는 것-를 정죄하였으며, 성직자들의 임무와 책임을 연거하고 정의하였고, 성유물과 면죄부 사용을 정의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신학원의 설립을 명령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직 임명에 필요한 교육에 관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를 장려하여 그의 신학을 가톨릭교회의 주류로 삼았다. 또한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조처들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은 라틴어판 성경인 벌게이트가 도그마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가장 큰 권위를 지닌다는 것, 전통이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는 것, 성례는 일곱 가지이며 미사는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 드려지는 진정한 희생이라는 것, 2종 성찬, 즉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는 것 등을 선포하였다.
 
이 복잡한 역사와 회의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이 적었던 것, 그리고 많은 군주들이 회의의 결정들을 자기 영토에서 발표하기를 거부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트렌트 공의회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 현대 가톨릭교회는 루터가 저항하였던 중세교회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한 반작용의 흔적을 지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그 후 4세기 동안 이러한 반동의 결과로 로마교회는 트렌트 공의회가 부인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20세기에, 비로소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벗어난 별개의 개혁 방안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 후스토 곤잘레스, 엄성옥 역, 종교개혁사서울: 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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