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요일

페레올(Ferréol, Jean-Joseph-Jean-Baptiste, 1808-1853) - 주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Ferréol, Jean-Joseph-Jean-Baptiste, 1808-1853

 
페레올, 장 조제프 장 바티스트(Ferréol, Jean-Joseph-Jean-Baptiste, 1808-1853)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3대 조선대목구장. 세례명은 요셉. 한국 성은 고().
 

1808
 
  • 18081227일 프랑스 아비뇽 교구의 퀴퀴(Cucuron)에서 태어났다.
 
1838
 
  • 183892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나 정확히 언제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39
 
  • 조선 선교의 임무를 띠고 1839428일 프랑스를 출발하였다.
 
1840
 
  • 123일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페레올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당시 조선 교회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새 선교사영입을 준비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 조선 신자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해지자 서만자에서 약 50일정도 체류하던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직접 조선의 국경 지역으로 가기 위해 몽골과 만주를 향해 떠나 22일 후 봉천에 도착하였다. 본래 이지역은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 구역이었으나, 당시에는 북경교구에서 본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들이 이를 시기하여 요동 지역 신자들에게 프랑스 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자, 페레올 신부는 다시 서만자로 돌아가 앵베르 주교가 보낸 편지를 보고 양부(Yang Vou) 지역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요동 신자들의 방해로 실행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몽골로 피신을 한 그는 1838814일자로 벨리나(Bellina) 명의 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1843
 
  • 1939921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3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서한을 1843년 315일에 받았다. 그리고 1231일 개주(蓋州)의 양관 성당에서 만주교구장 베롤(E. J. F. Verrolles, 方若望) 주교의 주례로 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844
 
  • 성성식 후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때마침 자신의 성성식에 참석한 신학생 김대건에게 조선 입국로 개척을 명하였다. 김대건은 1844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페레올 주교는 그해 말 김대건과 함께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 국경을 떠났으나, 국경에서 아직은 선교사를 맞이할 수 없다는 조선 신자들의 이야기만을 들었다. 이에 그는 김대건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돌아갔다.
 
1845
 
  • 결국 김대건이 이듬해 11일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서울에 도착한 후 해로 개척에 필요한 배 한 척(이후 라파엘[Raphael] 호로 명명됨)을 구입하여 6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오자 페레올 주교는 817일 상해의 금가항 성당에서 그의 사제서품식을 집전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교를 위해 중국에 도착한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와 함께 831일 라파엘 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서울을 목표로 하여 출발하였으나 해류의 영향으로 928일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강경 포구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제주도를 출발한 이들은 184510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 나바위에서 곧장 서울로 올라온 페레올 주교는 상복을 입고 본격적으로 신자 방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우촌 방문 외에도 메스트르,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영입에도 관심을 기울여 김대건 신부로 하여금 서해 해로 개척의 임무를 담당케 하였다.
 
1846
 
  • 서해 해로 개척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18465월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돌아왔으나 65일 체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병오박해가 발발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 교우촌 방문을 재개하기에 앞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특별히 전능하신 이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성모성심회가 설립되었다. 즉 선교사들은 1841년 교황청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정한 것과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위험한 여행을 할 때 성모 마리아께 의지함으로써 보호를 받았던 일을 상기하며, 마리아의 도움으로 모든 위험을 면하였다고 믿었다. 이에 이들은 1846112일 수리치골(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에 성모성심회를 설립하였다.
  • 이처럼 페레올 주교의 활발한 전교 활동에 힘입어 그가 입국할 당시 6,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는 185011,000, 185312,175명으로 급증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목 활동을 펴 나가는 데 있어 주로 양반 계층들을 신임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반발을 사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1853
 
  • 쉴새 없는 교우촌 방문과 선교사 영입 등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1851년부터 점차 건강이 쇠약해진 페레올 주교는 결국 1853234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412일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