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金大建, 1821-1846)】
【1821년】
- 8월 21일 :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남
【1836년】
- 4월 :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됨
- 7월 11일 :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와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서 합류
- 12월 2일 : 세 신학생이 함께 순명과 봉사를 서약
- 12월 3일 : 정하상(바오로)ㆍ조신철(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 12월 28일 : 조선 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무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 鄭) 신부 댁에 도착
【1837년】
-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 : Libois 신부)에서 칼레리(M. Callery)ㆍ데플레슈(M. Desfleches)ㆍ르그레조아(Legrégeois) 신부 등에게서 수학
- 8월 :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
【1838년】
- 겨울 : 마카오로 귀환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 열병으로 사망
【1839년】
- 4월 6일 :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
- 11월 : 마카오로 귀환
【1841년】
- 11월 :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년】
- 2월 15일 :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 2월 28일 : 마닐라 도착
- 3월 10일 : 마닐라 출발, 대만으로 향함
- 3월 27일 : 대만을 경유, 양자강 앞바다의 주산도(舟山島)에 입항
- 6월 27일 : 양자강 하구 도착
- 7월 초 : 오송(吳淞) 도착
- 8월 23일 : 파보리트(la Favorite) 호를 타고 온 최양업을 만남
- 8월 29일 : 남경(南京) 도착. 남경조약 체결로 에리곤호에서 하선.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으로 최양업과 함께 귀국 길에 오름
- 9월 11일 : 오송 도착
- 9월 16일 : 상해 베지 주교 댁에 도착
- 10월 2일 : 상해 출발
- 10월 23일 : 요동 해안 도착, 25일에 하선
- 10월 26일 : 요동의 백가점(百家店) 도착. 최양업,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 12월 23일 : 봉황성(鳳凰城)의 중국측 변문으로 출발(1차 탐색)
- 12월 27일 : 변문 인근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 12월 29일 :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1차 입국)
- 12월 31일 :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1843년】
- 1월 1일 : 변문 도착
- 1월 6일 : 백가점 도착
- 3월 : 변문으로 나가 조선 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2차 탐색)
- 4월 :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계속
- 9월 : 변문으로 나가 조선 교우와 접촉한 뒤 소팔가자로 귀환(3차 탐색)
- 12월 31일 : 개주(蓋州)의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뒤 소팔가자로 귀환
【1844년】
- 2월 5일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위해 훈춘(琿春)으로 출발(4차 탐색)
- 3월 8일 : 훈춘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2차 입국).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우 상봉
- 4월 :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 계속
- 12월 25일 :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음
【1845년】
- 1월 1일 : 봉황성 변문으로 나가 조선 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으로 귀국(3차 입국)
- 1월 15일 : 서울 도착. 돌우물골(石井洞)에 유숙
- 2월 : 중병에 걸려 15일 동안 고생함
- 3월 : 신학생 2명을 지도
- 4월 30일 :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 11명의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
- 5월 28일 : 오송 도착
- 6월 4일 : 상해 도착
- 8월 17일 :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 8월 24일 :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횡당(橫塘) 성당에서 첫 미사
- 8월 31일 :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 호를 타고 상해 출발
- 9월 28일 : 제주도 표착(4차 입국)
- 10월 12일 :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 11-12월 : 서울 및 은이 공소 순방
【1846년】
- 4월 13일 :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서울로 출발
- 5월 14일 :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 5월 25일 : 연평도 도착
- 5월 27일 :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 도착
- 5월 29일 :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탁송
- 6월 1일 : 순위도 등산진으로 귀환
- 6월 5일 : 체포됨
- 6월 10일 : 해주 감영으로 압송
- 6월 21일 :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 6월 22일 : 이후 46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음
- 7월 30일 : 프랑스 신부들과 최양업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한 보냄
- 8월 26일 :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한 작성. 이 무렵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함
- 8월 29일 :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 9월 15일 :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 9월 16일 :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 10월 26일 :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사후】
- 1857년 9월 23일 : 가경자로 선포됨
- 1901년 5월 21일 : 유해가 미리내에서 발굴되어 용산 신학교로 이장됨
- 1901년 10월 17일 : 유해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짐
- 1925년 7월 5일 : 시복됨
- 1949년 11월 15일 :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
- 1950년 6월 25일 : 유해가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져 안치됨
- 1950년 9월 28일 : 유해가 경남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됨
- 1951년 : 수복 후 서울 혜화동의 소신학교 성당으로 안치됨
- 1960년 7월 5일 :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져 안치됨
- 1984년 5월 6일 : 시성됨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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