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崔良業, 1821-1861)】
【1821년】
- 3월 1일 : 충청도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순교자 이성례(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
【1836년】
- 2월 6일 :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방(P. 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의 거처에 도착
- 12월 2일 :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순명과 복종을 서약
- 12월 3일 : 밀사 정하상(바오로)ㆍ조신철(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책문으로 출발
- 12월 28일 :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입국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샤스탕(J. H. 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만남
【1837년】
- 6월 7일 : 중국 교회 밀사의 안내로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 : 르그레즈와 신부) 안에 설립된 ‘조선신학교’에서 칼르리(J. M. Callery) 교장 신부, 르그레즈와(P. L. Legrégeois) 신부, 리브와(N. F. Libois) 신부 등에게서 수학
- 11월 27일 : 동료 최방제, 위열병으로 사망
【1839년】
- 4월 6일 :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칼르리ㆍ리브와 신부 등과 함께 마닐라로 피신
- 9월 12일 : 부친 최경환, 기해박해로 포도청에서 옥사 순교
- 11월 말 :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귀환
【1840년】
- 1월 31일 : 모친 이성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
【1841년】
- 11월 :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년】
- 7월 17일 : 브뤼니에르(Brulley de la Bruniére)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la Favorite) 호에 승선하여 마카오 출발
- 10월 22일 : 상해를 거쳐 요동 반도 남단 태장하(太莊河)에 도착(1차 귀국로 탐색)
- 11월 : 페레올(J. J. Ferréol, 高) 주교가 있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에 도착
【1843년】
- 12월 31일 : 개주 양관에서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축성식에 참석
【1844년】
- 4-12월 :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와 제1-5품까지 받음
【1845년】
- 8월 17일 : 김대건 부제,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 10월 12일 : 페레올 주교, 다블뤼(M. N. A. Daveluy, 安敦伊) 신부, 김대건 신부 조선 입국
【1846년】
- 1월 말 : 최양업 부제, 메스트르(J. A. 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의 훈춘으로 감. 이후 만주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이틀 만에 석방됨(2차 귀국로 탐색).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지도
- 9월 16일 : 김대건 신부,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
- 12월 말 : 최양업 부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책문에서 박해 소식을 들음(3차 귀국로 탐색). 조선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옮겨가 있던 홍콩으로 출발
【1847년】
- 1847년 초 :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 7월 28일 :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함선을 타고 조선으로 출발(4차 귀국로, 1차 해로 탐색)
- 8월 26일 : 고군산도 부근에서 난파 후 상해로 귀환. 이후 서가회 안의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
【1849년】
- 4월 15일 : 서가회 신학원 성당에서 예수회의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F. Maresca, 趙方濟)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
- 5월 :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상해로 귀환(5차 귀국로, 2차 해로 탐색). 상해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감. 이후 만주 선교사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 밑에서 성직 수행
- 11월 3일 : 요동으로 온 메스트르 신부를 만남
- 12월 3일 :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 시도. 메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입국 성공(6차 귀국로 탐색, 13년 만에 귀국). 서울에서 하루를 유숙한 뒤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도와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상봉
【1850년】
-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순방(1850-1861년)
【1854년】
- 3월 : 3명의 신학생을 페낭 신학교로 보냄
【1857년】
- 3월 25일 : 다블뤼 신부의 보좌 주교 축성식에 참가
【1860년】
- 경신박해로 죽림(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냄
【1861년】
-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차 상경 중 경북 문경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
- 11월 초 : 베론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J. Pourthié, 申妖案)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배론으로 옮겨 안장
【1942년】
- 12월 : 제천 신자들, 최양업 신부의 무덤 단장하고 묘비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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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가톨릭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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