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요일

다블뤼 신부(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1818-1866) -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신부, 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1818-1866

 

다블뤼, 마리 니콜라 앙토안(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1818-1866).
성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5대 조선교구장. 축일은 920. 세례명은 안토니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1818
 
  • 1818316일 프랑스 아미앵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34
 
  • 183410월 파리 교회의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1836
 
  • 1836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로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웠다.
 
1841
 
  • 184112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동안 그는 예수회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건강 때문에 입회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생 쉴피스 신학교도 1년 간 휴학하여야만 했다.
 
1843
 
  • 사제 서품 후 르와에(Roye) 본당의 보좌 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한 다블뤼 신부는 184310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 그 해 2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24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9월말로 기록되어 있음).
 
1845
 
  • 마카오 대표부에서 그는 18457월에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éol, ) 주교의 간청을 받고 조선 선교를 지원하였다.
  • 18458월 초,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로 가서, 8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한 뒤, 8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웠다.
 
1846
 
  • 18461월부터는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점차 더 먼 곳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김대건 신부는 184665일 순위도에서 붙잡혀 9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 김 신부 체포 소식을 들은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처음에는 외리골로, 나중에는 성치골(현 전북 익산군 여산면 대성리)로 피신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지만, 112일 수리치골(현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에 도착한 뒤에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심신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1847
 
  • 이때 겪은 고생으로 그는 1847년 봄에 중병을 앓았고,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에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1850
 
  • 18501월에는 중병으로 인해 전년 말에 귀국한 최양업(토마스)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수년 동안 순회 전교를 하지 못한 채 소년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1856
 
  • 한편 그는 1856년부터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사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입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다
  • 그뿐만 아니라 푸르티에(J. Pourthié, 申妖案) 신부 등이 해오던 사전 편찬 작업을 이어받았는데, 이 사전은 1866년의 병인박해 후 선교사들에 의해 보완되어 1891년 홍콩의 나자렛 인쇄소에서 나선소사전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857
 
  • 그러던 중 다블뤼 신부는 18563월 조선에 입국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1857325, 서울에서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다.
 
1861
 
  • 그 후 다블뤼 주교는 1861615일 최양업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최 신부가 활동하던 경상도 남부 지역을 떠맡았다.
 
1862
 
  • 그리고 1862년에는 그 동안 수집 정리해 온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선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에게 보냈다. 이 자료들이 바로 다블뤼 비망기라 불리는 것으로, 달레 신부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1874년에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 간행하였던 것이다.
 
1863
 
  • 그러나 1863년 봄에 다블뤼 주교가 내포 지방에서 전교를 하고 있던 중 판서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 일명 판숫골) 주교 댁에 이웃집 화재가 옮겨 붙어 가산과 남은 한국 자료들은 모두 불타고 말았다.
 
1865
 
  • 1865년 늦가을, 베르뇌 주교의 건강이 악화되자 다블뤼 보좌 주교는 만일 주교가 사망하면 자신이 조선교구장직을 승계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1122일자로 돌연 사직서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알브랑 교장 신부와 로마의 포교성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1866
 
  • 그러나 이 사직서가 채 받아들여지기도 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1966223일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 댁에서 체포되어 그해 37일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자연히 조선교구장직을 승계하여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규장 재임 기간은 23일에 불과하였다.
  •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지 4일 뒤인 311일에 다블뤼 주교는 거더리(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에는 위앵(L. Huin, ) 신부와 오메르트 신부가 자수하여 그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330일 갈매곳(현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일명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이때 황석두와 장주기가 이들 세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당시 다블뤼 주교의 나이는 48,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21년이었다.
 
사후
 
  • 순교 3일 뒤 그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홍산 남포의 서들골로 이장되었다.
  • 1867228일 그의 고향 아미앵에서는 순교를 기리는 대대적인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다.
  • 18823월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지게 되었다.
  • 1894년에 시신이 조선으로 옮겨졌다.
  • 1900년부터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
  • 1967년부터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 196810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다.
  •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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