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요일

베르뇌 주교(Berneux, Siméon François, 1814-1866) -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Berneux, Siméon François, 1814-1866

 
베르뇌, 시메온 프랑수아, Berneux, Siméon François(1814-1866)
성인.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4대 조선교구장. 세례명은 시메온.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 축일은 920.
 

1814
 
  • 1814514일 프랑스 망(Mans) 교구의 샤토 뒤 르와르에서 태어났다.
 
1837
 
  • 프레시네(Précigné)의 소신학교와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3752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839
 
  • 서품 직후 대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183971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1
 
  • 1840115일 통킹(Tong King, 현 북베트남)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마카오를 거쳐 1841116일 통킹에 도착하였다.
  • 한편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머무르는 몇 주 동안 한국의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에게 신학을 가르치자고 하였다.
  • 통킹에 도착하여 약 3개월간 남딘(Nam-dinh)의 푹낙(Phuc-nhac) 본당 근처에 숨어있다가 1841411일에 체포된 베르뇌 신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위에(Hué) 감옥에 갇혀 있었다.
 
1843
 
  • 18433월 프랑스 군함 에로인(Héroine) 호의 레베크(Lévéque) 함장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1844
 
  • 315일 중국 선교를 위해 요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1년간 베롤(Verrolles) 주교를 도와 활동하였다.
 
1849
 
  • 베르뇌 신부는 1849년에 만주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오랫동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54
 
  • 1854년에 이르러 동료 신부들의 간청으로 그해 1227일 주교 성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본래 그는 트레미타’(Trémita) 명의로 성성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 그러나 이에 앞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 주교는 1845715일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베르뇌 주교를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지명하였었다. 이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185323일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485일자 교황 칙서를 통해 베르뇌 주교를 갑사(Capsa) 명의의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으로 부임할 것을 명하였다. 이 교황 칙서는 성성식 3일 전에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1855
 
  • 베르뇌 주교는 18559월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로 가 그곳에서 푸르티에(1830-1866), 프티니콜라(1828-1866) 신부와 합류하였는데, 한편 조선에서는 그의 입국을 돕기 위해 매스트르 신부의 지시를 받은 홍봉조(洪鳳周)1855322(26) 서울을 떠나 황해도 장연을 거쳐 421(317) 강남에 도착해 있었다.
 
1856
 
  • 상해에서 홍봉주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117일 상해를 떠나 요동, 장연, 해주를 거쳐 185632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 )의 집에 머무르면서 한국말을 배우는 등 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위장결석(胃腸結石)이 재발되어 고생하다가, 3개월 후 어느 정도 병세가 호전되자 서울 및 인근 60개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57
 
  • 베르뇌 주교는, 입국 이듬해인 18573월 다블뤼 주교를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 성성식 다음날인 326일부터 3일 동안 조선교구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란 사목 서한으로 같은 해 82일 일반 신자들에게 반포하였고, 성직자들에게는 동일한 내용을 18584월에 라틴어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교회가 점차안정되고 체계화되어 갔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1856-1857년에는 신자 수가 15,206명에 이르렀고, 1858년에는 예비 신자가 3배나 늘었으며, 1859년에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전 포교지에서 성사가 집행되었다.
  • 한편 교세가 증가하자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함과 동시에 교회 서적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를 통해 신자들의 무지를 개선하고 성직자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1861
 
  • 이러한 가운데 18613월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신부가 조선에 부임하면서 베르뇌 주교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베르뇌 주교는 전동에서 태평동으로 거처를 옮겨 홍봉주, 이선이 등과 함께 생활하였다.
 
1963
 
  • 또한 그는 현지인 사제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조선의 사제 양성 기관으로는 185524일 이전에 매스트르 신부가 설립한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지만 너무 궁벽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환경도 좋지 않아 1963년 이후 제2의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밖에도 베르뇌 주교는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전교에 활용하였으며, 성영회(聖嬰會) 사업도 전개하였다.
  • 1863년에는 황해도ㆍ평안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1863-1865년 사이에 세 차례나 이 지역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베풀었다.
 
1865
 
  •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1865년 조선의 신자수는 23,000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입국할 당시에 비교할 때 8,000명이나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곧 이어 일어난 병인박해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 이에 앞서 러시아는 19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차지한 뒤 자주 조선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김면호, 홍봉주, 이유일, 남종삼 등은 이를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여러 차례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서양 제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의 남진을 막자는 방아책을 건의하면서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1866
 
  • 당시 황해도ㆍ평안도 지방을 순시하던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과의 면담 소식을 접하고 1866129일 서둘러 귀경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과의 회동이 지연된 상태였고, 러시아의 위협도 감소되어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박해 상황을 전한 동지사 이홍민의 보고 등이 이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조두순, 김병학 등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하게 제기되면서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던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과의 면담 약속을 기다리다가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1866223(19)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다.
  • 체포된 후 먼저 우포도청으로 끌려간 베드뇌 주교는 이곳에서 2차례 문초를 받은 뒤, 32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37(121)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1838-1866), 도리(1839-1866), 볼리외(1840-1866) 신부 등과 함께 군문 효수형을 당했다.
 
사후
 
  • 그들의 시신은 형장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12(328)에 박순지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으며, 527(414)에는 다시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로 옮겨졌다.
  • 그후 189910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9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을 앞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 196810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품에 올랐고,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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