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구베아 주교, Alexander de Gouvea, 1751-1808

구베아 주교Alexander de Gouvea, 1751-1808

 
알렉산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1751-1808). 북경 주교(1782-1808).
 
포르투갈의 에보라에서 출생하였다. 1773년 프란치스코회 제3회 정규 회원으로 입회하여 리스본 수도원에서 수도서원을 하였으며,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리스본의 왕립 과학 한림원의 회원이 되었다. 1782년 교황으로부터 북경 주교로 임명되어 다음해 22일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품을 받은 그는, 1784년 마카오의 포교지 신학교를 다시 열고 고아의 라자로회 회원들을 불러 그 신학교를 맡아보게 하였다. 북경에 부임한 것은 1785118일이고, 1808(76) 뇌일혈로 사망하기까지 24년 간 북경교구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신심이 깊고 열심한 주교였다. 그러나 중국 의례에 대한 교황청의 금지령, 특히 조상 제사 금지령을 준수시키는 데 엄격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하는 북경 주교로서 보호권 수호에 집착한 나머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북경의 다른 나라 선교사들과 충돌하며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북경 주교로 있으면서 건륭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흠천감(欽天監)의 감정(監正), 국자관(國子館)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의 영직(榮職)도 역임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것은 1784년 초이고 구베아 주교가 북경에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그러므로 이승훈이 북경에 이르러 남당 주교좌 성당으로 구베아 주교를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청했다는 달레(Ch. Dallet)의 기술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훈의 영세 사실을 알게 되고 17902월 윤유일을 만나 그에게 견진을 준 후부터는 조선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에게 사목 서한을 돌려 보내며 선교사를 영입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권하였고, 같은 해 8월 윤유일이 건륭제 80회 탄신을 계기로 예비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에 다시 나타나자 이번엔느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였다. 한편 다음해 3, 국경에서 선교사를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합의를 하고, 같이 온 예비 교우에게 직접 영세를 주었으며 그에게 미사 도구까지 들려보냈다. 윤유일은 떠나 보낸 후 구베아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에게 2통의 편지를 보냈다(1790106). 첫째 편지에서 그는 조선에 기묘하게 복음이 전해지고 신속히 발전한 상황과 이미 선교사를 임명한 사실을 보고하였고, 둘째 편지에서는 앞으로의 조선 포교지의 관할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만일 조선 포교지를 프랑스 선교단에 위임한다면 그들이 다시 만주에 독립된 교구를 세우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경 교구의 평화가 교란될 위험이 있다 하며 은근히 반대하였다. 그는 포교성성에서 조선 포교지를 어느 선교단에 위임하든 간에 그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하면서도 북경은 조선과 가장 가깝고 조선에 입국하려면 선교사들이 반드시 북경을 거쳐야 하므로 북경 교구에 위임하는 것이 마땅함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포교성성은 구베아 주교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교황에게 건의함으로써 교황 비오 6세는 17924월 조선 교회를 구베아 주교의 개인적인 지도와 보호에 맡기게 되었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약속대로 17912월에 선교사를 조선 국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조선 교우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북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조선 교회로부터 3년 이상 소식이 끊겼다가 1794년 초에 가서야 조선 교회의 밀사 지황(池璜)이 북경에 나타났다. 이에 구베아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다시 약속하고, 첫 번째 선교사는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주문모 신부를 새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주 신부는 1794년 말 국경을 넘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1796년 말에는 동지사(冬至使) 편을 이용하여 조선 교회의 현황과 복음 전파의 어려움에 관해 북경 주교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 신부는 얼마 안 가서 박해(1801)로 희생되고 말았다. 이에 황사영은 박해의 경위와 그 대책을 건의하고자 구베아 주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帛書)이다. 이 서한은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되었지만,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 박해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포교성성에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1807105)에서 구베아 주교는 이 박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조선 교회는 아직 공포와 박해 가운데 있으므로 그 교회에 관해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고, 다만 교우들이 그들의 신앙을 항구하게 지키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었던 조선 교회에 대한 보호권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망과 더불어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조선 교회를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역시 그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고,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 대한 관할권이 구베아 주교의 후계자로 연장되었고, 그것은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그것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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