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주문모(周文謨, 1752-1801)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 순교자. 중국인으로 세례명은 야고보. 포르투갈 이름은 벨로조(Vellozo).
 

1752년 중국 강남 소주(蘇州)의 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소주 지역은 17세기 초 이래 천주교가 융성하던 곳으로, 주문모가 태어날 당시에는 신자수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인 배경과 주문모가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집안 사람들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주문모는 7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는 부친마저 사망하면서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의 고모는 낱에는 수를 놓아 생활비를 벌었고 밤에는 주문모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되어 결혼을 하였으나 3년 만에 상처(喪妻)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기에 글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여러 번 낙방하자 폐기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북경으로 가 북경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1794년 사이에 구베아(A. de Gouvea)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편 이승훈을 비롯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6년 평신도를 사제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케 하는 가성직자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의 부당성을 깨달은 지도급 신자들은 성사의 집전과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북경 교회에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윤유일이 1789년과 1790년 두 차레에 걸쳐 북경에 파견되었고, 당시 북경교구장이던 구베아 주교로부터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중국인 오() 요한 신부(포르투갈 이름은 도스 레메디오스)였다. 구베아 주교가 오 신부를 선택한 이유는 북경에 서양인 선교사가 부족한 현실과 또 박해의 위험을 감안하여 외모가 조선인과 비슷한 중국인 신부의 파견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오 신부는 1791년 북경을 떠나 국경으로 갔으나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하였고, 결국 1793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 사이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진산사건을 겪은 조선 신자들은 1793년에 다시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지황과 박요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오 신부의 후임으로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제반 권한을 받은 주문모 신부는 17942월에 북경을 떠나 20여일 후 책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얼음이 풀려 조선에 잠입하기 어렵게 되자, 겨울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10개월 동안 만주 교회를 순회하였다. 그러다가 17941224일 드디어 지황 등의 안내를 받아 의주로 입국하였고, 179514일 경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계동의 최인길 집에 머물렀다.
 
주문모 신부는 우선 가능한 한 빨리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 말 공부에 전념하였고, 여러 지도급 신자들을 접촉하며 조선 교회의 사정도 파악해 갔다. 그런 가운데 성주간이 되자 신자들에게 세례와 보례(補禮)를 주었고,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부활절에는 조선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렇듯 입국 후 몇 개월 동안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54()에는 이존창과 유관검의 안내로 양근의 유유일 집을 거쳐 고산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관검 집을 방문한 뒤 상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54() 신입 교우인 진사 한영익이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쳐 그리고 인상 등을 이벽의 동생인 이석에게 밀고하였다. 이석은 이 내용을 좌의정 채제공에게 알렸고, 채제공은 다시 정조에게 보고함으로써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이 사실은 신자들에게 탐지되어 신부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최인길ㆍ윤유일ㆍ지황이 체포되어 1795628(512) 포도청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최인길의 집을 떠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 등 몇몇 교우 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근의 권가 집에서 3일을 머물렀고, 충청도 연산의 이보현 집에서 2개월 가량 머무는 등 1년 정도 지방에서 생활하며 전교 활동을 하다가 17965()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주로 강완숙의 집에서 거처하였지만,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지방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798년에는 반년간 피신하였다가 이듬해에 상경하였고, 1799년 겨울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18004()에 서울로 돌아왔다.
 
주문모 신부는 교회의 조직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최창현을 총회장에,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하는 등 회장제(會長制)를 설정하여 교회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여회장을 임명한 것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1797년경에는 교리 교육과 전교를 목적으로 명도회를 설립하고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였다. 명도회는 북경에 있던 단체를 모범으로 조직된 일종의 비밀결사로, 박해 시대 조선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1796년 황심(黃沁, 토마스)을 북경에 파견한 이래 거의 매년 북경교구와 연락을 유지하였으며, 서양 선교사의 영입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직전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1801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는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편 18004()에 상경하여 여러 사람의 집을 전전하던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신유박해가일어나자 2()에 박동(礡洞)의 양제궁(良娣宮)3일간 머물다가 황해도 황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무고한 신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다시 돌아와 424(312) 의금부에 자수하였으며, 포도청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531(419)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수원교구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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