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金相濬, 1881-1933)】
성결교 초대목사.
【1881년】
- 1881년 11월 11일 : 평남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에서 엄격한 유교집안 의성 김씨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 그가 살던 집은 독립투사 김붕준 씨의 뒷집이었다. 그는 영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1897년】
- 1897년 : 연안 이씨의 이성녀와 결혼 후에 7남매를 두었다.
【1901년】
- 1901년 : 20살이 갓 넘은 어느 날 평양 시에 나갔다가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김씨 문중으로부터 야소교를 버리라는 회유와 설득을 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02년】
- 1902년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동양선교회가 경영하는 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1903년).
【1905년】
- 1905년 : 7월에 한국인 정빈이 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김상준과 정빈은 이후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 1905년 겨울에 관서지방 유학생을 중심으로 ‘태극학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을 때 참여하였다.
【1906년】
- 1906년 : 김혁준ㆍ강태온이 일본으로 건너와 동경 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 11월 일본에서 동양선교회가 조직되었다.
【1907년】
- 1907년 : 동경 성서학원을 정빈과 함께 졸업하였다.
- 당시 김상준과 정빈 이외에 이장하ㆍ김두혁ㆍ김혁준ㆍ강태온ㆍ안동원 등도 공부하고 있었다.
- 함께 졸업한 정빈(鄭彬)과 1907년 5월 2일에 귀국 후 곧 전도에 나섰고 5월 30일, 서울 무교동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성결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 1911년 3월 : 전도관 안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목회자 양성을 시작하였다.
【1912년】
- 1912년 3월 : 정빈의 후임으로 복음전도관 제2대 주임교역자가 되어 1913년까지 시무하였다.
【1914년】
- 1914년 4월 22일 : 성결교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김상준을 비롯한 이장하ㆍ강태온ㆍ이명직 등이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와 신학교 운영에 있어서 동지인 정빈과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었고 정빈이 북간도로 떠난 후 그 혼자 성서학원 교수와 사감을 맡았다.
【1915년】
- 1915년 : 아현성결교회에서 1916년까지 시무하였다(제2대 당회장).
【1916년】
- 1916년 : 아현교회와 성서학원을 사임하고 개성교회 주임교역자로 전임하였다.
【1917년】
- 1917년 : 정빈이 북간도에서 성결교회로 돌아오자 김상준은 성결교회 교역자직을 사직하고 동양선교회를 떠나 조선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목사가 되었다. 그는 10여년간 조선교회 부흥운동에 전력을 다하였다.
【1918년】
- 1918년 : 한국에 있어서 계시록을 최초로 체계있게 해설한 신학자로 유명한 그는 1918년 12월 《묵시록강의》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는 성서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시록에 몰두하여 집필한 것이다. 초창기의 출판물이지만 신학서적으로서의 격식을 모두 갖추었으며 학문적인 이론을 토대로 해서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계시록 전체를 풀이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19년】
- 1919년 : 3ㆍ1운동 당시에는 김붕준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0년】
- 1920년 3월 1일 : 길보른 선교사의 도움으로 형무소를 나왔다.
【1921년】
- 1921년 6월 : 성결교회의 최초의 체계적인 교리서 《사중교리》가 출간되었다.
【1925년】
- 1925년 9월 9일 : 기독신보에 “신앙의 사죄”라는 설교를 기고하였다. 1933년까지 이명직의 《활천》에 집필활동을 계속한다. 그는 후에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의 주간을 지냈고 만년에는 황해도 신계(新溪)군 일대에서 목회를 하였다.
【1933년】
- 1933년 : 부산 수정동 성결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 1933년 6월 12일의 집회 후에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가 1933년 10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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