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정빈(鄭彬, 1873-1949) - 한국성결교회 창립의 주역

정빈(鄭彬, 1873-1949)


한국성결교회 창립의 주역
 
1873
 
  • 1873: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79
 
  • 8세부터 서당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자기 적성에 맞는대로 외국어와 산술, 그리고 또 다른 학문까지 익히기 시작했다. 정빈은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의가 있어서 신학문을 습득하는데 열심을 다하여 주력하였다.
 
1882
 
  • 동기는 확실히 모르나 그는 10살쯤에 이미 기독교로 입신하게 되어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였다.
 
1893
 
  • 1893: 1893년에 세워진 종로의 연동교회의 무어(Moore)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종로 YMCA에 가서 성경공부와 신앙강좌를 들었다.
 
1905
 
  • 1905: 정빈은 19057, 8월경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 정빈의 유학 시절은 일제에 의해 주권이 사실상 빼앗기고 침략의 마각(馬脚)이 여실히 노출된 울분과 참담의 시기였다. 정빈은 민족 주체의식이 철저한 일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청을 받아 매 주일마다 태극학회 회원 가운데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설교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태극학회에 연결되어 성서를 가르치는 중에 기독교를 전하면서 그들의 모임에 자주 회동하였으나, 정빈은 일제에 대항하는 정치적 구국 운동에 다른 깊은 관계를 갖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정빈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서는 이 나라의 소망스런 전정(前程)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7
 
  • 190752, 정빈은 김상준과 함께 동양선교회 소속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정빈은 그 해 530일에 김상준과 함께 경성 종로 염곡()에 위치한 다 쓰러져 가는 조선식 기와집 몇 칸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복음전도관을 개설하였다.
 
1911
 
  • 19113월 경성 무교정전도관 안에 임시로 성서학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때 정빈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서학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12
 
  • 이듬해인 19123월 죽첨정(현 충정로)에 정식으로 성서학원이 신축되어 이전하자, 정빈은 무교정전도관 주임 교역자직을 사임하고 신학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914
 
  • 1914년에 동양선교회 카우만, 길보른이 내한하여 한국전도관 최초로 김상준, 이명직, 이장하, 강태온 등 에게 목사안수식을 거행했다. 이 안수식에 최초의 복음전도관의 창립자이고 주임이며, 성서학원 교수인 정빈이 탈락한 것은 의외였다. 그 이유는, 정빈이 제도적인 목사보다 순수한 복음전도자의 삶을 선호하는 고집 때문에 목사안수를 거부한 것이다.
  • 1914년 김상준과 의견 충돌로 인해 교수사직서를 제출하고 북간도(北間島)로 떠나고 말았다.
 
1917
 
  • 북간도로 건너간 정빈은 아무런 제약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3년 후인 1917년 다시 성결교로 돌아와 동양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안성교회를 창립하였다.
 
1919
 
  • 1919년에 인천교회에 다시 파송되어 3년간 목회하였다.
 
1921
 
  • 19219월 종래에 사용하던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교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명칭을 성결교회로 바꿔 기성교단으로 경화되어 갈 무렵, 그는 인천교회를 사직하고 다시 북간도로 떠났다. 정빈이 성결교회를 떠난 사건은 창립자에 대한 여러 가지 안타까움과 함께 부정적인 평가(교단 의식의 미약)와 또한 여러 의문을 던져 준다. 그러나 처음 이 땅에 김상준과 함께 복음전도관(성결교회)을 세울 때에 두 가지 선교 원칙(첫째, 어떠한 새 교단을 만들지 않는다. 둘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 가서 직접 복음을 전한다.)에 입각한 행동의 발로였다. 1921년 재차 북간도로 건너간 정빈은 나라를 잃고 실의에 젖어 단지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대다수의 재만(在滿) 한국인들에게 사중복음을 전하였다.
  • 재차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에 온 정빈은 감로(監老)로서 북만주 간도의 용정(龍井)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정빈은 용정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1921년 이종덕(李鍾德) 감목의 뜻에 따라 만주 종성동에 세워진 종성동성경학원에서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31
 
  •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괴뢰 정권인 만주국이 만주 내에 있는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할 때, 정빈은 동아기독교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면서 다만 복음의 교사와 전도자로서 수다한 영혼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다가 끝내는 60이 넘는 노년의 무명 전도자로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생명이 있는 동안 순복음만 전하다가 아골 골짝 빈들과 같은 황막한 만주 땅에서 주 오시는 날까지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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