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安明根, 1879~1927)】
독립운동가, 천주교 신자.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말 유학자 안향의 후예.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고, 안춘생의 큰아버지이다. 독립유공자 안홍근은 그의 남동생이다.
부친 안태현은 진해현감을 지낸 안인수의 2남이다. (3남 태훈이 안중근의 부친이다)
【1879년】
-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출생하였다.
- 어린시절 사촌형 안중근과 함께 성장하며 화서학파의 거유 고능선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으며 당시 청계동으로 몸을 피해 잠시 머물던 백범 김구와도 만날 수 있었다.
【1885년】
-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7살에 신천의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897년】
- 신천 청계동에서 부친 안태현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사건이 있은 뒤에, 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로 가서 양병학교(養兵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1910년】
- 한일합방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총독 등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 11월, 배경진ㆍ박만준ㆍ한순직 등과 함께 학교 설립을 의논하였다.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申錫孝)로부터 3,000원, 신천의 이완식(李完植)으로부터 6,000원을 얻고, 신천의 민병찬·민영설 등에게 10만원을 요구하여 준비해 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민병찬ㆍ민영설 등이 재령 헌병대에 밀고하여 이해 12월 평양에서 붙잡혔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ㆍ한순직ㆍ원행섭(元行燮)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사건, 즉 안악사건의 발단이었다.
- 12월, 그는 일제 총독 데라우치가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암살을 기도, 평양에서 잠복 대기해 있던 중,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당했다. 일제는 이 일을 기화로 김구ㆍ최명식ㆍ이승길ㆍ도인권 등 해서지방의 지사 및 자산가를 검거 투옥하였다(안악사건).
【1911년】
- 7월 22일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1924년】
- 출옥하여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 2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예하 행정관(1924년 12월 1일까지).
【1927년】
- 7월 7일, 만주 길림성 의란현 팔호리에 거주하며 활동하다가 신병으로 별세하였다.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9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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