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사건(安岳事件)】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신천(信川) 출신 안명근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확립하고 침략자 일본을 물리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특히 독립운동의 방향을 무장운동 형태로 정하고 황해도 일대의 유지들을 찾아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력적 실력행사로 적을 응징할 계획에 매달렸다. 그러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 높던 민족운동가인 김구ㆍ김홍량ㆍ김용제ㆍ김용진ㆍ최명식 등은 직접적인 무력운동보다는 문화ㆍ교육사업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독립의지를 성취할 것을 원하였다. 이에 안명근은 단독으로 무력운동의 결행을 결심하고 마침내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이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을 눈치 챈 일본 경찰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안명근을 체포, 서울 경무총감부로 압송하였다. 안명근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그동안의 거사계획 대부분을 실토하였는데 군자금모금관계, 사전 공동모의자 한순직ㆍ박만준 등을 실토하고 말았다. 일경은 이를 근거로 안악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들을 총 검거할 모략을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사건을 과장, 날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처음에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과는 관련이 없이 서간도의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던 안명근을 체포하고 과장 날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명근은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1910년 11월 입국하였다.우선 황해도 부호들을 방문, 이원식(李元植)ㆍ신효석(申孝錫)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냈다. 신천 발산(鉢山)의 민병찬ㆍ민영설 등에게 보조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위협하며 ‘조국광복의 큰 뜻을 모르는 자’라고 질책한 뒤 평양으로 떠났다.민병찬·민영설 등은 즉시 재령헌병대에 밀고해 안명근은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서울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어 심한 문초를 받았으며, 계획에 동의한 배경진(裵敬鎭)ㆍ박만준(朴萬俊)ㆍ한순직(韓淳稷) 등도 검거되었다.무관학교 설립계획의 발각은 황해도 지방의 배일문화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예의주시해 오던 조선총독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제는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 관련 인사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이들 중에도 특히 김홍량(金鴻亮)ㆍ김구(金九)ㆍ최명식(崔明植)ㆍ이승길(李承吉)ㆍ도인권(都寅權)ㆍ김용제(金庸濟) 등은 주로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를 중심으로 애국적 문화운동에 종사하였던 명사들이었다.일본경찰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안명근은 끝까지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순직이 회유에 말려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군자금이라고 진술하였다.김구가 허위날조라고 반박하기도 했으나 최명식이 민족자본육성을 위해 안동현(安東縣)에 무역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경찰은 이를 무관학교설립계획과 결부시켜 사건을 더욱 확대, 날조하였다.잔인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강도 및 강도미수죄ㆍ내란미수죄ㆍ모살미수죄(謀殺未遂罪)로 혐의를 씌워 안명근 이하 1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911년 8월 공판에서의 검사공소장은 허위날조문서였는데, 피고 등이 부호들을 살해하고 우편국을 습격할 음모를 꾸몄다고 하였다.
【일제가 주장하는 105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0년 음력 8월 중 데라우치 총독이 평안도지역을 시찰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양기탁ㆍ윤치호(尹致昊)ㆍ안태국(安泰國)ㆍ이승훈(李昇薰)ㆍ옥관빈(玉觀彬) 등 신민회 간부들은 서울 서대문의 임치정(林蚩正)의 집에서 수차례에 걸친 모임을 갖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모의하였다. 총독 암살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총독이 시찰하기로 예정된 경의선(京義線) 연변의 8개 도시인 평양ㆍ선천ㆍ정주(定州)ㆍ납청정(納淸亭)ㆍ곽산(郭山)ㆍ철산(鐵山)ㆍ차련관(車輦館)ㆍ신의주(新義州) 등지에 동지들을 동원하여 역전에서 행해지는 총독환영식에서 환영객을 가장한 뒤, 기회가 올 때 총독을 암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일이 성공할 경우, 이를 국제여론에 알리기 위해 다수의 선교사들을 참여시켜 사후 상황에 대비토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위 8개 지역에서는 음력 8월부터 10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총독 암살을 준비하였으나 총독의 시찰 정보가 잘못된 보도로 밝혀짐에 따라 실패하였다.그후 다시 총독이 압록강 철도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행(巡行)한다는 정보를 다시 입수한 신민회 관계자들은 총독암살 계획을 다시 수립하였다. 그 계획은 1차 계획과 마찬가지로 총독이 평안도 일대를 순행하는 1910년 음력 10월 29일부터 11월 1일 사이 선천과 신의주역에서 총독 환영식이 개최될 때, 거사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여 미수에 그쳤다고 주장하였다. [우리역사넷]
1911년 1월초 사실상 안명근의 거사계획과는 무관했던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검거되기 시작했다. 김홍량을 필두로 김구ㆍ김용제ㆍ최명식이 검거되었고 이에 김용진ㆍ이상진ㆍ양성진ㆍ박도병ㆍ한필호ㆍ장명선ㆍ고봉수ㆍ한정교ㆍ박형병ㆍ이태주ㆍ최익형ㆍ고정화 등이 계속 검거되었다. 이들은 재령 헌병대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신천의 이원식ㆍ박만준ㆍ신백서ㆍ이학구ㆍ유원봉ㆍ유문형ㆍ이승조ㆍ박제윤ㆍ최중호 등도 검속되었고 그 밖에 재령에서는 정달하ㆍ민영룡ㆍ신효범ㆍ도인권 등도 잡혔다. 또한 안악 양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고향인 백천에 와 있던 김병옥도 색출, 검거되었고 송화의 신석충은 검거 압송도중 재령강 철교에서 차창밖으로 몸을 던져 자결하기도 했다. 이때 검거된 인물들은 대부분 안악의 면학회(勉學會)에 관여한 인연이 있거나 안명근과 접촉했던 인물로 많은 수의 기독교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검거된 이들은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으며 허위사실에의 자백을 강요받았고 애국지사들은 지독한 악형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필호 등은 고문을 못이겨 순국하는 비극도 일어났다. 마침내 일제는 애국인사들에게 내란미수ㆍ모살미수 심지어 강도ㆍ강도미수죄까지 억지로 누명을 씌워 실형을 선고하고 복역케 하는 한편 모든 사회활동의 권한마저 박탈해 버렸다. 안명근의 종형제를 비롯, 김구ㆍ김홍량ㆍ한순직ㆍ원행섭ㆍ배경진ㆍ이승길ㆍ박만준 등이 15년 징역, 도인권이 10년, 김용제 외 3명이 7년, 고봉수 외 4명이 5년, 그밖의 40여명은 외딴섬 등으로 유배, 금족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안악사건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서북계 민족지도자, 특히 기독교인사를 중심으로 한 진취적 인물에 대한 말살조치의 일환이었으며 안악사건 직후 일어난 105인사건과 함께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모략적 탄압행위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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