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9일 월요일

우덕순 [禹德淳, 1876~1950] 이토 저격 동참, 밀정 논란

우덕순(禹德淳, 1876-1950)

 
독립운동가, 일면 우연준(禹連俊). 자는 홍(), 호는 단운(檀雲).
 

1876
 
  •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4-5세경 서울로 이주한 후 동대문 근처에서 잡화상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1905
 
  • 1905년경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였다.
  •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 5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해외로 망명해 국권회복 투쟁을 할 것을 결심, 그해 겨울 칠순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은 1904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고 한다]
 
1906
 
  •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는 동지들의 재정 지원으로 1906년 계동(啓東)학교를 창립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청년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전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 등과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의병 1천명을 징집한 후 김영준을 교관으로 연추에 훈련소를 만들어 항일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1908
 
  • 1908년 여름, 참모중장 안중근과 함께 함경도 경흥ㆍ회령 지방의 일본군영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 19085월경부터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는 군수물자 부족 등 장애에 부딪치자 이범윤 부대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이 해 6월 홍범도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회령 삼태골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의병은 패퇴하고 국내진공작전은 실패하였으며, 우덕순은 안중근과 퇴각하던 중 헤어진다.
  • 우덕순의 회고록에 따르면 퇴각 중 그는 신발이 없어 맨발로 산을 헤맸고, 비가 와서 추위에 떨었으며, 퇴각 중 몇 일 동안 음식을 제도로 섭취하지 못하는 등의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생을 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퇴각하던 우덕순은 일본군에게 검문을 받게되었다. 당시 우홍이라는 이름으로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그는 소지품에서 우홍이라는 도장이 발견되면서 체포되었고, 함흥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을 받던 중 그는 같은 감옥에 있던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하였고, 원산을 거쳐 1909년 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1909
 
  • 1909년 봄, 다시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ㆍ김기열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해 결사보국을 맹세, 이름을 연준으로 개명하고 담배행상을 하며 블라디보스토크 각지를 왕래하면서 동지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 19091020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에서 우덕순은 러시아인으로 사장인 미하일로프, 유진율, 이강, 정재관, 윤일병 정순만, 안중근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안중근이 자진하여 실행 책임을 맡았으며, 우덕순에게 이 거사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중근의 권유를 받은 그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토 처단의거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음 날 21일 안중근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우덕순은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을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 23일 저녁 하얼빈에 있는 김성백의 집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서로의 각오를 다지면서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덕순은 한글로 거의가(擧義歌)를 지어 답례하였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寃讐(원수) 너를 만났도다 / 너를 한번 만나고저 일평생에 원했지만 / 何相見之 晩也런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ㆍ청 양지 지날때에 /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양천하고 기도하길 /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 鳴呼奸惡 이 도적아 아등민족 2천만을 /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 소리없이 뺏노라고 궁흉참악 저 수단을 /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 갑오독립 시켜 놓고 을사체약 한 연후에 /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시 몰랐노라 /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 너 뿐인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5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대로 / 내 손으로 죽이리라.”
  • 1024일 우덕순은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역에서 이토을 기다리기로 하였고, 안중근은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 채가구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역 지하에 위치한 찻집에서 숙박하였다. 찻집은 위쪽이 채가구역의 플랫폼으로 연결되어 있어 의거를 실행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 1025일 저녁부터 채가구역에서는 다음날 도착할 이토를 맞이할 환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우덕순은 그를 처단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하여 준비한 탄환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사용하였던 것과 같이 탄두에 자형 흠이 새겨져 있었다.
  • 이토가 도착하는 1026일 우덕순은 새벽 5시경 일어났다. 러시아 헌병들은 국적과 이유를 불문하고 채가구역에 대한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우덕순은 출입을 막는 러시아 헌병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가 있는 찻집에서 화장실로 가기 위해서는 채가구역내의 플랫폼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핑계로 이토를 처단할 기회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헌병은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따라서 우덕순은 채가구역 지하의 찻집에서 이토가 타고 왔던 기차가 들어오고, 다시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토도 당초 우덕순의 기대와 달리 채가구역에서 내리지 않고 떠났다. 우덕순은 숙소 안에서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성공하기만을 기원하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경 러시아 헌병에게 급작스럽게 체포된 그는 이토가 안중근에게 처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코레이시케 우라!(한국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뻐하였다.
  • 안중근이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 체포당한 뒤 이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역시 러시아 헌병 20여 명에게 포박당했으며 곧 국경지방 재판소에서 수일간 심문을 받은 후 일본총영사관으로 인계되었고 다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호송되었다.
  • 19091026일 하얼빈 의거 후 우덕순은 안중근 등과 함께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힌 후 일본에게 인계되었다. 뤄순으로 압송당한 우덕순, 안중근 등은 뤄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 16개월 형을 선고 받는다.
 
1910
 
  • 222, 6회에 걸쳐 공판을 마치고 결심공판에서 1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며 그해 9월 여순감옥에서 경성감옥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1908년에 경흥헌병대 파옥 탈출 사건이 탄로나 다시 함흥지방 검사국으로 이감,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즉위에 의한 특사령으로 경흥사건은 면죄되어 다시 서대문감옥으로 압송되었다.
  • 안중근과 함께 뤄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우덕순은 그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하였으나, 계속 미루어져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10326일 점심 무렵 감옥 내의 교회당으로 불려간 우덕순은 안중근의 시신이 담긴 관을 확인한다.
 
1915
 
  •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152월에야 출옥하였으며 일경의 감시로 국내에서는 활동할 수 없으므로 그해 5월에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할빈ㆍ치치하루ㆍ만주리ㆍ납하ㆍ리하 등 각지를 왕래하면서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고 교포들과의 상호간의 연락과 제2세 교포들을 위한 육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1931
 
  •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세력이 만주 전역에 뻗쳤을 때 그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 수차에 걸쳐 투옥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기독교 장로로서 교회를 근거삼아 우리말 보존에 헌신하였다.
 
1945
 
  • 19458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헌에 검속당했으며 해방과 동시에 출감, 흑룡강성 한인민단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이때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교포피난민들을 조국으로 수송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48
 
  •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안중근 기념사업이었다. 추모회를 개최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등 동지 안중근을 기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시국에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국민연맹, 대한국민당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귀국 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배은희ㆍ신익희ㆍ윤치영ㆍ지청천 등과 함께 건국사업에 투신하였다.
 
1950
 
  • 1950926, 공산군에 의하여 참살당했다.
 
1962
 
  • 31,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2019
 
  • KBS1 <시사기획 창>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구성됐다. 제작진은 일본 외교사료관 등을 뒤져 입수한 5만 장의 기밀문서를 토대로 독립운동가들을 팔아 넘긴 밀정 895명의 명단을 밝혀냈다. 제작진은 하얼빈 의거로 수감됐던 우덕순이 출옥한 뒤, 1920년대 이후부터 보인 행보를 들어 그를 밀정으로 지목했다. 그 근거는 일제의 어용단체인 '조선인민회'의 하얼빈 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는 사실이었다. 제작진은 우덕순이 일제로부터 밀정에 대한 대가로 활동비를 지급받았으며, 당시 밀정들을 통솔하는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실 우덕순의 친일 의혹은 학계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던 사실이다. 제작진이 지적한 대로 우덕순은 조선인민회 하얼빈 지회장으로 활동하며 일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고, 해당 단체는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지휘를 받는 친일어용단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덕순의 생애를 연구한 역사학자들 중에는 이미 이 사실을 근거로 우덕순의 변절 의혹을 제기한 이들도 있다.
    우덕순에 대한 일제의 기록에서도 그가 정말 변절자였는지 의심케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1934년에 기록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외국의 용의 조선인 명부'에는 우덕순에 대해 '배일사상이 농후하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안중근의 동지였다는 이력 때문에 지속적으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 쉽게 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로 해방 직전까지도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덕순의 친일 의혹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 차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여러 정황 증거를 토대로 우덕순의 친일 의혹에 반박하는 의견도 존재하는 만큼, 섣불리 그를 밀정이라 결론 내린 KBS <시사기획 창>의 보도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오마이뉴스, “안중근의 동지가 일제의 밀정? KBS 결론 아쉽다” 2019818]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제천문화대전,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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