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0일 화요일

한석진 [韓錫晋, 1868~1939]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장로교 제6대 총회장

한석진(韓錫晋, 1868~1939)

 

1868
 
  • 186896,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부동에서 한지운(韓祉云)3남으로 출생했다. 서북지역의 전통적인 유교 선비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유교의 형식적인 도덕관념에 실증을 느끼고 16세 때 구도의 길을 떠나 석숭산 불교 암자에서 불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백두산 도인을 찾아 가출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884
 
  • 1884, 철산 출신 이일심과 결혼하였고 그해 말에 장남이 출생하였다.
 
1887
 
  • 1887년부터 장사를 목적으로 중국과 만주를 오고가던 한석진은 초기 자생적 신앙공동체와 교제를 통해(만주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돌아온 백홍준, 서상륜 등과 만나면서) 기독교를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1891
 
  • 18913, 선교사 마펫((S. A. Moffett, 마포삼열)과 게일(J. S. Gale, 기일)을 압록강변 통군정에서 만났고, 그해 9월 의주를 방문한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김정호(金定鎬), 김석례(金錫禮)이다.
 
1892
 
  • 189211, (마펫의 소개장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여 정동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신학반에서 성경과 교리를 배웠고,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3
 
  • 1893년에 서울의 장로교선교회에서는 평양에 새로운 선교지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고, 마펫, 스왈렌, 리 세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이때 한석진은 조사로 동행하였고,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부를 개척할 때 가족을 평양에 이주시켜 평양선교부 설치를 도왔다.
  • 그는 189310월 마펫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임명되었다. 특이한 것은 한석진은 다른 조사와는 달리 선교사로부터 조사의 봉급을 받지 않고 전도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조달했다는 점이다. “내가 우리 일을 하면서 외국사람에게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요.” 이러한 주체적 의식은 선교사-조사간의 평등을 강조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선교사들의 안식년을 한인 목회자들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1894
 
  • 서울의 장로교선교부에서 평양으로 파송 받은 마펫, 스왈렌, 리 세 선교사는 1894년 평양을 방문하여 한석진 조사를 통해 가옥을 한 채 구입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평양주민들과 관가에 알려지면서 큰 저항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에는 샀던 집을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했다.
  • 이 사건이 있은 직후인 1894년 봄, 한석진은 평양 사람들이 외지인에게는 집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한석진은, 부모가 있고, 오랫동안 자신과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의주에서 자신들의 가족을 평양으로 이주시킨 후 자신의 명의로 집을 샀다. 그리고 이 집은 얼마후 평양의 첫 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한석진의 이 작은 집은 널다리골 교회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널다리골 교회를 뿌리로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비롯하여 남문밖교회, 산정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등이 분립해 나갔다.
  • 18945, 한석진 조사와 김창식(金昌植) 전도인(당시 평양에서 홀 의사의 전도인이며 후에 감리교 초대 목사가 됨) 7명이 평양감사에게 잡혀간 일이 있다. 평양감사 민병석이 그를 체포하여 하늘에 주먹질을 하면석방해 주겠다며 고문하였지만 한석진과 김창식은 끝내 거절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마침 마펫 선교사는 서울에 가 있었고, 감리교 선교사 홀(Hall) 의사가 그들의 석방을 위해 민병석을 찾아갔으나 민병석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홀은 마펫 선교사와 당시 고종의 어의로 있던 알렌과 같이 일하던 스크랜톤 의사에게 알리는 동시에 미국과 영국 공사에 알렸다. 결국 고종은 한석진과 김창식의 석방을 명하였다. 이때 마펫 선교사가 직접 고종의 글을 민병석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한석진 목사는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동한 힘들어 했다고 한다.
  • 1894, 한석진 조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는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이기풍, 김종섭 등이 있다. 그는 평양 외곽에도 전도하여 융진교회와 자덕교회, 남창교회, 소우물(장천)교회, 구동창교회, 추빈리교회, 미정리교회, 무진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1896
 
  • 1896년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조사로 섬기고 있던 한석진 역시 평양을 떠나 소우물(현 장천)로 들어가 안식하며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 한국교회를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교회로 만들려는 자주적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서양교회의 축소판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선교사들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펫은 한석진을 평양에 새 선교부를 설치하는 일에 자신의 보조자로 채용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한석진은 마펫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도의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8
 
  • 1898독립협회 관서지회 규칙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애국적연설(설교)를 듣고 도산 안창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 18989월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회 회관 설립을 추진하였고, 평양 대동강 서편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도산 안창호의 유명한 쾌재정 연설도 주선하였다. 또한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한석진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1903
 
  • 한석진은 1903624, 자신의 안식년(1896) 때 개척한 소우물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고 그해 9월부터 장로회공의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904
 
  • 1904년 평양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1907
 
  • 19076월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이기풍, 양전백 등과 함께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 선교사 마펫은 1907214일자 <한국에 있어 교육받은 교역자들>이라는 논문에서 최초의 7인 평양신학교 졸업대상자들에 대한 인물평을 하였는데 한석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한석진 그는 1891년 나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신앙경험이 가장 오래였다. 그는 본래 의주사람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만주등지에 여행한 경험도 가졌다. 내가 그를 의주 통군정 위에서 만났을 때 그는 빛나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았고 나의 전도하는 말을 듣고는 더욱 호기심이 나서 여러 시간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의 복음에 대한 태도와 열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마침내 신약성서를 받아 읽어 보고 진리임을 깨닫고 나에게서 전도지를 얻어 매일 자기 상점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의 신앙은 불길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장사를 중단하고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성경을 더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도 그 열심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그를 평양에 새 선교부를 설치하는데 보조자로 채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저 유명한 그의 평양에서 겪은 박해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10여년 전에 발간한 <조선 북부지역에 있어서 교회의 발전>이란 적은 책에 자세히 기록되었거니와 그는 실로 사형장에서 그의 신앙의 견고함을 확증하였다.”
  • 1907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독노회 창립시 서기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독노회록 서문을 작성하였다.
  • 대동군 소우물교회와 미림교회, 이천교회 등의 전도목사로 취임하였다.
  •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평안북도 선천, 정주, 박천 등을 위대모 선교사와 함께 순회하는 전도목사가 되었다.
 
1909
 
  • 1906년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기독교청년회’(YMCA)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고국의 장로교 독노회에 교회설립을 위한 목회자 파송을 정식으로 요청하였으며, 장로교 독노회는 이 요청을 19099월에 열린 제3회 독노회에서 중요한 정식안건으로 다루었다.
  • 독노회는 나름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서구 문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서 크게 발전되었고 그 실력을 뒷받침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하려는 야욕이 노골화되어 보호 조약을 구실로 내정 간섭에서 전적 병탄으로 급진전되어 가는 때이었으므로 동경 유학생의 위치가 미묘한 데다가 적어도 일본이 수도에 가서 굽히지 않는 지도자가 되려면 그 인격에 있어서나 지식에 있어서나 탁월한 인물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동 노회는 신문사의 사장의 중임을 맡은 한 목사를 일시나마 동경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 이미 서구화된 일본문화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개화된 인물, 2)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으로부터 유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민족 의식이 강한 인물, 3) 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일본이 수도에서 활동하려면 인격이 탁월한 인물, 4) 앞서 문명을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니만큼 그 지식에 있어서도 탁월한 인물로 한석진 목사가 선택되었다. 한석진 목사는 1908년 유학생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던 일본 도쿄 한인교회(현 도쿄 교회)1909년 선교사로 부임하여 3개월간 그 교회를 이끌고 돌아왔다(10~12).
 
1910
 
  • 그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19102월 초교파 연합신문 예수교회보를 창간,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11
 
  • 1910안동기도처’(1911년에 안동교회로 승인받음)에 취임하였고, 1911년 서울 안동교회의 청빙을 받고 부임하여 곧 교회건축을 시작하였다.
    양반교회로 유명한 안동교회는 한국에서 남녀 자리 사이의 휘장을 철폐한 첫 교회가 되었다. 신축된 안동교회는 그 출입문도 남녀 구별 없이 하나로 하였다. 안동교회에 그의 선구자적인 목회정신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 휘장철폐 문제는 1913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에 헌의되었으나 조심스럽게 개교회 형편에 따라 하도록 결의될 정도로 당시 한국교회로서는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1912
 
  • 1912년 경기충청노회장, 총회 서기가 되다
 
1913
 
  • 1913년 제2회 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 피택되다
 
1916
 
  • 1916년 그는 경남 마산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고 그곳에서 목회하였다.
 
1917
 
  • 1917,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다. [한석진 목사는 1907년부터 1911년 장로회노회 서기를 역임하였고, 1912년 장로회총회의 창설과 함께 서기로 피선되었다. 1913년 제2회 장로회총회 때에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 19179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이는 제6회 총회에서 목사, 장로 총대 각기 76명과 선교사 총대 42명이 모여 제2회 부회장을 역임한 한석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총회장으로 선임된 한석진 목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 수고하다가 건강 악화로 귀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1916년에 소천하자 그의 정신을 추모하는 시간을 잠시 갖기도 하였다.
  • 이때 중요한 결의내용이 있었다. 천주교회 교인과 결혼하는 일은 위태한 일이기 때문에 당회가 성혼이 되지 않도록 권면하는 일들을 결의하였는데, 불신자와 혼인한 사람에 대한 책벌과 해벌 기한은 당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하였다. 당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경우에 당사자는 물론 부모까지 책벌을 받았으나, 배우자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 해벌해 주었다.
  • 한국 장로교회의 최고직을 맡은 한석진 목사는 명석한 두뇌와 민첩한 사리판단으로 명총회장의 이름을 날렸으며 한국교회를 통솔 지도하였다. 특히 그는 교파연합사업기관인 연합공의회의 설립을 위해서 그 대표위원으로 크게 활약했고 그 밖에 헌의부장, 정치부장, 특별위원 등 여러 가지 총회 요직을 맡아서 일하였고, 그 중에 특별히 장로회헌법 제정 및 수정위원으로 이자익, 함태영 목사 등으로 더불어 많은 공적을 남겼다.
  • 19171021일 부인 이일심 여사가 별세하였다.
 
1918
 
  • 1918년 늦은 봄에 친구인 김천일 목사의 권유와 주선으로 평원군 출신인 오선신(吳善信) 부인을 새로 맞이하였다.
  • 1918, 초교파 연합기구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1924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개칭)의 창설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1
 
  • 총회장을 역임한 한석진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31운동으로 체포된 신의주교회 김병농 목사 후임으로 부임하여 김병농 목사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목회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교회(후에 신의주제일교회)에서 목회하는 중 교회가 계속 성장하자 1921년에 신의주제이교회를 분립해 주었다.
 
1925
 
  • 19252월 제13대 의산노회(義山老會) 부회장에 피택되었다.
 
1926
 
  • 1926년 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 무렵 일본 제국의회에서 입법 추진하고 있던 종교단체법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
 
  • 1925, 선교사 권위주의에 도전하였다. 민족적 자의식이 강했던 한석진은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도 반대했다. 그는 평양과 서울, 마산, 신의주에서 목회하며 예배당을 건축할 때마다 한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짓겠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 192512, 미국 해외선교운동가 모트(J. R. Mott) 박사의 내한을 계기로 서울 조선호텔에서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朝鮮基督敎奉役者議會)가 개최되었을 때,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해서 동석한 원로 선교사들을 향해 한국교회는 한국인들에게 맡겨두고 선교사들은 떠나라고 발언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날 주요 의제는 한국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였다. 의식 있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대해 지배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석진 목사가 그 선봉에 섰다. 선교 사업을 성공시키고 효과적으로 하려면 선교사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가 서게 되면 그 사업을 현지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다 보면, 자기가 세운 교회며 학교라는 생각에 우월감을 가져 영도권을 행사하려 하니 이것은 복음 정신에 위배되고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자립의 기반을 구축했으니 한국인들에게 맡기고, 선교사들은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발언이 30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해 온 선교사들의 귀에 거슬릴 것은 당연했다. 한석진 목사의 말은 계속 되었다.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 많이 하면서 머리들이 희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에서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셔도 좋을 줄 압니다. 이것이 참으로 한국을 위한 것입니다.” 그 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마펫 선교사가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한석진 목사가 일갈했다. 마 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 유해 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 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 선교사에게 떠나라고 한 것은 언뜻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석진 목사의 분노에 찬 호소는 한국 교회의 독립을 촉구하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여전히 한국 교회를 유아기의 미자립 교회로 인식하고 보호하려는 명분 하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교회 발전을 저해하는 선교사들을 향한 것이었다. 또 자립의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능력 발휘보다 선교사에게 의존해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한 한국 교회를 향한 것이었다. (이때에 한석진 목사의 이 발언을 통역하던 정인과 목사는 한석진 목사의 말을 차마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고 대의(大意)만을 통역하였다는 것이 후일 정인과 목사의 회고담이다)
  • 1900년대 초에 선교사들 사이에 한석진을 가리켜 저 사람은 선교사를 배척하는 사람이니 주의라하는 말이 빈번하게 오고갔다고 한다.
  • 1925, 총회수양관 건축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에는 강원도 금강산 온정리에 지을 총회 수양관 건축준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많은 수고를 하였다.
 
1929
 
  • 수양관 건축을 위해서 모금운동이 절실히 요청되자 그는 1929, 신의주교회를 사임하고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모금운동에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1930
 
  • 193065, 장남 민제(民濟)가 세상을 떠났다.
 
1931
 
  • 한석진 목사의 노력으로 1931911일 제20회 장로교총회를 이 수양관에서 모이고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수양관의 명칭도 장로교수양관이라고 하자는 것에 대하여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다만 기독교수양관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교회나 단체에서는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하자는 그의 주장이 관철되어 결정되었다. [이 수양관은 1941년 일본 사람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했다.]
  • 수양관 정초문
    修養舘建築略史吁乎 猗哉라 東半島 朝鮮 一隅天蔵別區金剛山世界 第一名勝이지마는 屢千載 暗煙深鎻하여 人跡寥寥터니 我東福音大開함을 하여 於是乎 世界 人士爭先 探勝場所現出된지라 하여 萬有創造(羅馬 120) 萬有扶持(希伯來 13)이신 造物主 하나님을 讚頌 하사이다. 此際에 우리 基督敎人責任上 聖號宣傳目標指示와 그의 能力下에서 此地修養舘建設計劃을 세우고 全朝鮮 基督敎 長老派 總會議決韓錫晋咸台永洪鍾弼 三人代表選定하여 이 일을 委任한 바 基址國有保安林中 八千坪當局交涉 貸付하였으며 建築費各敎會 及 信徒訪問 鳩聚하여 爲先 修養舘一部講堂着手 起工今日(19308月 初旬)定礎式擧行하므로 置此爲誌主降生 193089日朝鮮基督敎長老會 總會 修養舘建築委員 代表 韓錫晋 謹稿
 
1932
 
  • 1932년 제1차 총회 헌법 개정시 여집사제도 신설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934
 
  • 1934년 평양 장대현교회 분규 수습위원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장대현 교회를 수십년 동안 목회하며 지도하여 온 길선주 목사를 무조건 추앙하여 그의 계속 목회를 고집하는 편과 이에 맞서서 여러 이유를 들어 길선주 목사의 사임을 주장하는 반대편 두편이 끝까지 고집하여 서로 양보를 하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오랜 시일을 두고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석진 목사는 이덕환 장로와 함께 약 3개월간 모든 예배를 맡아보면서 기도와 권유로 원만 해결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분규가 오랫 동안 계속됨에 따라서 피차 간에 극도로 감정화하여 단시일 내에 융합되기는 어렵게 생각되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한석진 목사는 평양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1937
 
  • 1937년에 서울 당인리로 이사하였다.
 
1939
 
  • 1939820일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 1939년 봄에는 당시의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이 서로 중상하여 싸우고 분규를 거듭하고 있어서 교회 형편이 몹시 어지럽게 되었음을 개탄하면서 병환으로 힘없이 누워 있으면서도 가끔 찾아오는 교역자들의 손을 잡고 부디 싸우지 말고 주 안에서 서로 손을 잡아 하나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게 되자, 서울에서 송창근, 김재준, 함태영 등 ‘진보적학자들이 ‘조선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39년 이 학교가 문을 열자 한석진은 김재준 목사에게 한국인의 손에 의한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니 비로소 내 꿈이 이루어졌소.”라는 감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사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교파주의에 반대하다
  • 그는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교파주의도 반대하였다. 그래서 1909년 도쿄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 초교파 연합교회로 조직하였다. 1915년 자신이 속했던 경기충청노회에 교단명칭을 조선예수교회로 바꾸자고 헌의하기도 했다. 1930년 강원도 통천군 온정리에 장로교인들의 헌금으로 수양관을 지으면서 장로교수양관이라 하지 않고 기독교수양관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솔직 무탈한 성격의 한석진 목사
  • (채필근, 한국기독교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 267~271쪽 참조)
  • 그는 교회일에나 일상생활에 조금도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였다신앙의 근본문제나 사람의 양심문제를 몰각하는 자들이 다만 교회의 헌법이나 권징조례만을 내세우는 따위의 태도에는 아주 질색을 하면서 이에 반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그가 일체 주위를꺼리지 않으며 생명없는 규칙이나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모든 일에 파탈(擺脫)한 성품은 그가 자기 집에서 보신용으로 포도주를 쓰는 것이라든지 혹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신앙생활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그가 평소에 포도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牧師(목사)로서 못할 범죄나 하는 듯이 놀라는 사람을 보면허허 웃어버리고 도리어 그 사람을 준절히 책망하는 것이었다
  • 자네는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놀라는가? 그럴른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요새 목사들은 술도 안마시고 실상 술취한 사람 못지 않게 강주정을 하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지 않은가. 술도 안 먹고 정신이 똑똑해서 목사끼리 장로끼리 서로 싸우며 남을 중상하고 모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게 하지 않는가. 거기에 비해서 저할일 다하면서 제정신 차리고 정다운 친구를 만나서 한잔씩 나누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하고 태연히 이야기하시는데는 듣는 이가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  韓牧師(한목사)는 자기 집에서 가끔 손님에게 권연을 권한다그리고 하는 말이 골방에나 변소에서 남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는 공공연하게 피우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고 죄가 안되느니 속으로는 별짓 다 하면서 겉으로는 거룩한체 하는 꼴들 보기 싫어 한번은 金剛山(금강산修養舘(수양관)에서 어느날 저녁 식후에 韓牧師(한목사)가 옥류동 개울가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젊은 宣敎師(선교사)가 문득 놀라며 韓牧師(한목사교회법 어기시오섭섭하지요 할 때에 韓牧師(한목사)는 역시 허허 웃으시면서 당신들은 댁 골방에서 피우지요. 나는 金剛山(금강산) 대자연 속에서 피우고 있소. 염려마시오 해서 宣敎師(선교사)는 얼굴을 붉히고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 한목사는 만들어진 교규를 어길 생각은 없었으나 그 교규를 찬성하지는 않았다이유는 흡연과 음주가 천당길을 막는 것과 같이 강조하는 것은 거의 기만적인 행위이며 앞으로 언제인가는 그러한 강요가 무지의 소산임을 알게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견한 때문이었다그러므로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였다다시 말하면 무리한 교규를 만드는 것보다는 신도들의 교양을 높여서 비단 흡연이나 음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예의와 절제를 가지게 함으로써 교회 신앙생활을 정상화하자는 것이 韓牧師의 지론이었고 주장이었다
 
 # 한석진 목사에 대한 평가
  • 저는 주님께서 제게 한 씨[한석진]와 같은 좋은 조사를 주신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는 보배로운 사람이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 Samuel A. Moffett(1894)
  • 잘못된 겸양관(謙讓觀)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로 난 신자로서 가져야 할 솔직, 진실, 용기, 자존심, 독립심, 인내력과 주체성의 새 생활표준을 보여주었다.” - 백낙준(1971)
  • 한석진 목사는 한국 교회의 초대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배경은 유교적 전통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이오, 새로운 문화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눈을 떠 받아들인 통찰력과 선견지명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의 사진을 본 사람이 많을 줄 압니다. 오직 한 목사 한 분 만이 머리를 깎고 안경을 쓰고 단장을 가지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한가지 만으로도 그분의 시대 감각이 얼마나 예민했다는 것과 또한 무엇이나 좋은 생각은 받아들인다는 소신과 곧 실행에 옮긴다는 과감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게 합니다.” - 한경직 목사의 말씀 중
 
[주요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석진(韓錫晋)
정성한(2007). 한석진 목사와 일본 선교. 선교와 신학, 19, 117-148.
정성한(2008). 한석진 목사의 목회 지도력에 관한 연구. 신학과 목회, 30. 79-102.
김광수. 한국기독교인물사. 서울:기독교문사, 1974.
한영제 편. 한국 기독교 인물 100. 서울:기독교문사, 1987.
채필근. 한국기독교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1.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40주년 기념문집, 서울:한국기독교장로회, 1993.
김수진.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김수진 외.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 서울:쿰란출판사, 2010.
연도의 불일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채필근의 기록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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