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순(林鍾純, 1875-1947)】
일제강점기, 뉴욕한인교회, 오산교회, 평양 서문밖교회, 대타령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부흥사.
【1875년】
-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
- 6월 임종순 장로가 일본 유학생 선교를 위해 박영일 장로의 후임으로 일본으로 갔다.
- 백남훈이 1968년에 발간한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일생』에 의하면 박영일 장로의 후임으로 파견된 것이 1910년 6월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12년 6월이었으며, 당시에는 목사가 아닌 장로의 신분이었다. [이상훈(2017). 초기 재일조선인 선교에 대한 재고찰. 한국기독교와 역사(47), 269-299.]
【1916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19회)하였다.
- 6월, 목사안수를 받고 곡산읍지방 순회목사로 파송되었다.
【1919년】
- 서울 연동교회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재일 유학생 전도목사로 임명받아 도일, 토요쿄오를 중심으로 유학생 목회에 투신하였다.
【1921년】
- 뉴욕한인교회 초대 담임목사였다. 그는 피츠버그에서 열린 만국장로교 총회(1921년 9월 16일) 참석차 1921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던 학생과 하와이 농장에서 뉴욕에까지 와 망향의 설움을 달래던 노동자, 망국의 한을 품고 떠돌던 애국자들의 가슴에 복음을 심어준 목사였다. [뉴욕한인교회에는 제1대 담임목사로 1922-1923년 사역했다고 전한다]
- 9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만국 장로회 연합총회에 조선대표로 참석, 〈조선교회의 과거ㆍ현재ㆍ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다.
- 귀국하여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할 것뿐이오니 실력양성이 제일인 줄 압니다. 우리 총회에서 인물 양성을 어서 속히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고 하여 한국교회의 자립과 함께 자주의 책임과 권한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 그해 귀국하여 평북 정주 오산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9년】
- 평양 서문외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는 서문외교회에서 봉직하는 동안 그의 목회생활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서문외교회는 매회 2천 5백명에서 3천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이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 부흥사로서 활약하였다.
【1935년】
- 평양 대타령(大駝嶺)교회에 부임하였다.
【1936년】
- 광주양림교회에서 제25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남북 대립이 격화하여 남부 총대들이 남총회 분립운동을 일으켜 총회가 분열 직전에 놓여 있을 때 교회 합동을 호소,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회가 가장 번창하였던 서문외교회도 장로들의 분열에 휩싸이게 되었고 임종순 목사는 중풍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었다.
【1947년】
- 전신불수가 된 그는 월남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훈(2017). 초기 재일조선인 선교에 대한 재고찰. 한국기독교와 역사(47), 26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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