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2일 목요일

정춘수 [鄭春洙, 1874~1951] 민족대표 33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정춘수(鄭春洙, 1874~1951)

 
감리교 목사.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장,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고문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874
 
  • 211, 충청북도 청원군 회인면 두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873212일이다]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이다.
 
 
1882
 
  • 그의 부친 정석준(鄭錫駿)은 학문이 깊고 남다른 효성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정춘수는 부친의 영향으로 여덟 살 때 한학을 공부하였다.
  •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1897년까지).
 
1884
 
  • 부친 정석준이 사망하자 인근 인차리ㆍ계산리에서 살다가 숙부(정석영)을 따라 강내면 궁현리로 이주하였다. 미원면 출신의 민족대표 33인의 신석구ㆍ신홍식과는 이 무렵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1901
 
  • 함경도 원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고 했으나 원산의 여관에서 장로교 신자였던 여관주인을 만나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의 아내 임눌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정춘수는 그때 밤을 새워가며 신약성서를 두 번, 세 번 읽었다고 한다)
 
1903
 
  • 29세가 되던 해인 1903년 원산 남산동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의 감화를 받고 결신했다.
 
1904
 
  • 65, 원산 남산동교회에서 영국인 선교사 하리영(河鯉泳, Robert A. Hardie)에게 세례를 받고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 감리교 성서학원에서 수학하였다(1907년까지)
  • 당시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던 원산 배화여고 교원으로 있던 임눌리를 만나 결혼까지 하였다.
 
1905
 
  • 남감리회 매서인으로 활약하였다.
 
1906
 
  • 전도사직첩을 받고 교역에 나서 개성북부교회에 부임했다.
 
1907
 
  • 수표교 임시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곧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1
 
  • 111, 남감리교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목사 : 김흥순, 정춘수, 주한명]
  • 1220, 협성선학교를 졸업(1)하였다.
  • 서울 종교교회를 담임하였다(1913년까지).
 
1913
 
  • 개성북부교회를 담임하였다(1916년까지).
 
1916
 
  • 9, 원산 상리(上里)교회 담임으로 봉직했다(1919년까지).
 
1919
 
  • 215일 남감리교 연회에서 주최한 성경학원 백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했다가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오화영을 만났다. 오화영과 만난 그는 당시 세계적 화두였던 '민족자결론'에 입각한 조선의 독립을 꾀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 북감리회 소속으로 YMCA 간사이자 영신학교 교감으로 있던 박희도를 만나면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 220일 영신학교에서 박희도를 비롯해 신홍식ㆍ이승훈ㆍ오화영 등 기독교인사들이 모여 기독교 연합세력을 형성하기로 합의하였다.
  • 223일 원산에 있는 정춘수에게 오화영의 편지가 도착했다. 선언서의 발표일이 31일이라고 했다.
  • 227일 정춘수는 곽명리 전도사를 서울로 보내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받아오라고 했다.
  • 228일 원산으로 돌아온 곽명리 전도사는 오화영에게서 받은 독립선언서(100)를 건네주었다. 그는 곽명리ㆍ이가순 두 전도사에게 31일 원산에서 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부탁하였다.
  • 31일 아침 원산을 출발한 그는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화영의 집으로 갔지만 오화영 등은 선언서 발표 직후 일경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끌려간 뒤였다.
  • 36일 종로경찰서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거처를 통보하고, 반응이 없자 37일 오후 1시 경무총감부에 직접 출두하여 자수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의 첫 취조서 명칭은 심문조서가 아니라 자수조서, 피고인 대신 자수인으로 돼 있다.
  • 321일 서대문감옥에서 있은 검사 심문 때 난 원래 한일합병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합병 당시에 기대한 것과 같이 내선융화가 실행되지 않음을 유감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일본인 검사가 앞으로도 또 이 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최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종교 사업이나 하련다고 답했다.
  • 5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공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 피고는 이 선언서에 기재된 취지와 같이 조선독립을 허()하여 달라고 청원한데 찬성하였는가?
    : 나는 자치권을 달라는 것을 청원할 생각으로 명의를 내는 데 찬성하였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나의 의사가 아니다.
    : 피고는 독립선언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
    : 잘된 것도 있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고 그 선언을 하는 거도 나의 의사가 아니므로 31(선언식에) 오지 않았다.
    : 민족 자치란 것은 무엇인가?
    : 독립이라 하는 것은 일본과 전연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고 민족 자치라고 하는 것은 조선이 주권을 얻어 자치하면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인데 자못 한일합병 전의 통감부 시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 민족 자치를 한다면 어떠한 정체(政體)를 구성하려고 생각하였는가?
    : 그것은 일본정부에 자치를 허락한 후 공화정체나 전제정체를 할 것을 결정하면 좋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면 피고의 민족 자치라는 것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 나는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였다.
 
1920
 
  • 1030일 경성복심법원 정동분실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1921
 
  •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그는 55, 만기 출옥하였다.
  • 출옥 후 남대문 세브란스병원에서 몸을 추스른 후 7월초 원산으로 향했다.
  • 76, 원산 중리예배당에서 사도(使徒)의 애()’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는데 당시 그는 언변 좋은 목사로 통했다.
 
1922
 
  • 9, 개성북부교회에서 시무했다(19248월까지).
 
1924
 
  • 9, 개성중앙교회에서 시무했다(19268월까지).
 
1926
 
  • 9, 남감리교회 춘천지방 장로사(현 감리사)를 지냈다(1930년까지).
 
1927
 
  • 2, 신간회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0
 
  • 철원지방 장로사로 활동했다.
 
1931
 
  •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1932년까지)
 
1932
 
  • 서울 동대문교회를 맡았다(1933년까지).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고, 경성 수표교교회를 담임하였다.
 
1934
 
  • 서울 수표교교회 목사와 총리원 이사 등으로 시무하면서 행정수완을 발휘했다.
 
1935
 
  • 중부연회 부흥 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38
 
  • 193858내선(內鮮)기독교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총후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 연합회의 부위원장을 필두로 그는 기독교조선감리회,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등의 대표자로 활동하면서 종교를 통한 일제의 황민화 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 519,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 93,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전향서에서 아등(我等)은 종래 포회(抱懷)한 민족자결의 미망(迷妄)을 청산하고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시키는 것이 조선민중의 유일한 진로인 것을 인식하여 일본의 신민(臣民)으로서 노력할 것을 맹서하는 바이다라며 그간 활동자금으로 모은 24백 원을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해 국방헌금으로 내겠다고 밝혔다(매일신보, 1938.9.4.). 한 마디로 총독부에 충성맹세를 한 것이다.
 
1939
 
  • 1939917일 감리교의 수장인 김종우(金鍾宇) 감독이 갑자기 사망했다. 정춘수에게는 반전의 기회로 작용했다. 후임 감독을 뽑기 위해 928일 열린 총리원 이사회에서 그는 3대 감독으로 선출됐다.
  • 1019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메소지스도교회 총회 참석이었다. 조선감리교와 일본감리교 합동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1940
 
  • 19407,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을 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 그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맞춘 교단정비를 서둘러 어용 기독교회로의 타락을 도모했다. 194010월의 이사회에서 이른바 혁신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골자는 신학교의 무기 휴교, 기독교교육과정 내용 중 신체제에 순응하는 내용, 이에 상응하는 교사진의 개편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혁신 5조항을 채택했는데 사상성도(교학쇄신, 군사교련ㆍ신학교육), 사회교육(황도선양ㆍ반공ㆍ국방), 군사훈련, 일본적 기독교화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1941
 
  •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 12월 동양지광사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영미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였다.
  • 조선감리교단의 통리 자리에 오른 정춘수 목사는 1941년에는 여선교회와 연회를 해산하고 모든 조직의 명칭과 제도마저 일제의 요구에 따른 여러 형태로 바꾸었다. 그 후에도 신학교의 개편, 전시 대응 조처, 각 교회당의 시설의 군사적 활용 허용, 철제물의 헌납, 전시대응 강의, 모든 선교부 재산의 적산선포, 지원병제도 채용, 일본 군용기 헌납헌금 강제징수, 연성회(교역자를 대상으로 한 일본화교육) 실시, 황도문화관 설치, 교회의 통폐합, 일부 교회의 매각처분 등 교회나 성직자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날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1942
 
  • 동양지광1942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발표하였다.
  • 국민문학19423월호에 기독교와 신체제운동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 1942년에는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 채택을 주동한 유형기ㆍ구성서ㆍ전효배ㆍ정일형ㆍ송응국 목사 등이 일제 당국에 구속, 형고를 겪는 것을 조장, 방조하였고 완전히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교단 자체를 완전히 어용화시켰다. 물론 이 모든 행위가 그 자신의 독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고 일제의 회유와 위협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전제하더라도 그의 변절과 무분별은 극에 달했다.
 
1944
 
  • 1944년에는 조선종교전시보국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신사참배 및 신궁 조영(造營) 근로봉사와 비행기 헌납 등을 주도하였다.
  • 19443, 정춘수는 일제의 군용 비행기 헌납을 위해 전국의 39개 예배당을 폐쇄하고 교회 소유의 부동산을 매각하려 하였다. 소위 성전(聖戰)’을 위해 성전(聖殿), 즉 교회를 팔아치우려 했다니 가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셈이다. 심지어 친일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제명시키거나 출교 혹은 휴·퇴직 처분을 통해 교회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 7월 개신교를 통합해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고문을 맡아 일제의 황민화운동에 협력하였다.
  • 1944년 여름, 그의 친구이자 동지인 신석구 목사가 정춘수의 정릉 집을 방문했다. 정춘수의 친일행각을 지켜보다 못해 일부러 발길을 한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소고기 두 근이 들려 있었다. 신 목사는 정춘수에게 감독직만 수행하지 일본에 협력하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정춘수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친구의 충고를 끝내 듣지 않았다.
 
1947
 
  • 194723감리교회 배신(背信)ㆍ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行狀記)’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정춘수 등 친일목사들의 죄상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 3월초에는 감리교재건유지회명의로 정춘수 등 19명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기독교 황민화를 통해 경전을 모독하고 교회의 재산을 부정하게 처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성일보, 1947.3.7.)
  • 1947129일 서울 광희문교회 측은 정춘수와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대표로 비행기 헌납에 앞장선 이동욱(李東旭)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하였다. 내용인즉슨 이들이 조선기독교 감리교회를 일본기독교감리교로 개칭한 후 광희문교회를 11만원에 불법 매각하여 폭격기 한 대를 일본군에 헌납하였다는 것이었다. (부인신보, 1947.12.12)
 
1949
 
  •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반민피의자 검거에 나섰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해방 후 포천교회 목사로 있던 정춘수는 반민특위 사무국에 자수 의사를 밝혔다. 이에 특위 특경대원들이 312일 경기도 포천 자택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여 마포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친일목사 전필순도 이날 서울 봉익동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정춘수는 정식재판을 받지도 않은 채 416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19491122일 그는 또 다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천주교가 아니면 구령(救靈)을 할 수 없다며 천주교로 개종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반민족행위자로 체포돼 마포형무소 수감 시절 천주교 신자 조원환(曺元煥)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조원환 역시 그처럼 반민피의자로 수감된 몸이었다. 그가 45년간 몸담았던 감리교는 배신자운운하며 맹비난했지만 그는 오히려 개신교의 문제점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1950
 
  • 감리교단은 19504월 중부연회에서 정춘수를 교회법에 따라 면직처분 하였다.
 
1951
 
  • 한국전쟁으로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강외면 궁평리의 집안 손자뻘 되는 정인환의 집으로 피난하여 머물렀다.
  • 1951년 가을 정춘수가 병석에 눕게 됐다. 당시 77세로 이미 고령이었는데 결국 그해 1012일 청주 정인환의 집에서 사망했다. (정춘수 제적등본에는 사망일자가 1953110로 나옴)
 
1995
 
  • 고향인 청주시 3·1공원에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충청북도 출신인 신흥식·권동진·손병희·권병덕·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96년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철거되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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