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李東輝, 1873-1935)】
일제강점기 때, 학교와 서북학회 등을 설립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아호는 성재(誠齋).
【1873년】
- 12월 3일 함남 단천군 피도면 대성리에서 출생
【1880년】
- 8세 때부터 향리 대성제(大成齋)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0년】
- 17세 나이로 단천 네해진에 사는 18세의 강정혜와 결혼했다.
【1891년】
- 18세 때 단천군에서 통인(通引, 지방관장의 잔심부름)으로 일했다. 부친 이승교는 이동휘를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으로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군수였던 홍종후가 폭정을 일삼자 이를 규탄했다. 그러나 관아의 탐관오리에 혐오를 느끼고 얼마 후 상경하였다.
【1896년】
- 이용익의 주선으로 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를 졸업후 참위로 임관, 궁정진위 대장에 임명되어 고종을 경호했다.
【1902년】
- 7월, 강화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1903년】
- 11월,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 목사가 운영하던 잠무의숙을 확대ㆍ발전시켜 합일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였다.
【1904년】
- 보창학교 설립을 주도하였고,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토지참탈, 인권유린, 국법침탈행위 등을 규탄했다.
【1905년】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위법성을 지적하는 「유소」, 「유고이천만동포형제서」, 「유고임공사서」 등을 작성하여 반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06년】
- 1906년 대한자강회 지부를 강화도에 유치하고 지부장이 되었으며,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가입하였다.
- 10월에 이준ㆍ오상규ㆍ유진호ㆍ설태희 등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흥학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평의장직을 담당했다.
【1907년】
- 한북흥학회 부회장 자격으로 지회설립을 독려하였으며, 함경도 각지를 돌며 학교설립을 촉구하였다. 이와 함께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 7월, 한일협약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었다.
【1908년】
- 1월, 한북흥학회를 서우학회와 합하여 서북학회로 재창립하여 발전하였다. 이 단체는 이동휘ㆍ이갑ㆍ안창호ㆍ유동설 등이 중심이 되어 회보간행, 순회강연을 통한 민중계몽, 애국사상 및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으며 서북오도를 상징하는 뜻으로 오성(五星)학교를 설립, 후진 양성에도 매진하였다.
【1909년】
- 3월 군대 동지 연기익ㆍ김동수 등과 더불어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조직을 모의하다가 실패, 일헌에 체포되어 인천 앞바다 대무의도(혹은 백령도)에 그해 10월까지 유배되었다. 이때 강화도 선교사 벙커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며 그즈음 기독교인이 되었다.
- 이 해에 이동녕(李東寧)ㆍ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 산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 일대를 답사하였다. 또 신민회 간부로서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
- 일본이 날조한 「기독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기소는 면하고 풀려났으며 이후 일헌의 경계망을 피하여 간도 명동촌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그는 당시 이름 높은 애국지사요 기독교인들인 유동설ㆍ김하규ㆍ문치정ㆍ김약연ㆍ서상용ㆍ구춘선ㆍ유예균ㆍ정재면 등과 더불어 민족독립운동과 간도 이주민들의 농업진흥책 그리고 학교설립 등에 주력하였다.
-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로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었다. 1912년 6월에서야 유배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우리역사넷]
【1912년】
- 3월 캐나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간도국민회가 조직됨과 때를 같이 하여 이동휘는 장로교 교역자 중심의 구국전도회를 조직, 연해주ㆍ중국ㆍ한국 등지에 산재한 동포를 대상으로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 2월에서 3월경 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하였다.
- 9월, 권업회(勸業會)의 초청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동휘는 남도파·북도파 등 지방색을 타파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각파의 중요 인물을 초대하여 파벌을 청산하고 조직을 정비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권업회의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민중계몽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14년】
- 이상설(李相卨), 이종호(李鍾浩), 이동녕(李東寧),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으며, 대한광복군정부의 부통령이 되었다.
- 나자구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간도국민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이곳까지 미치어 다시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 동녕현 산분구에 북빈의용단, 왕청현 나자구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훈춘 지역과 연해주 지역의 무장 세력을 연계하여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1917년】
- 1917년 3월, 이동휘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새롭게 일을 도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나 러시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독일간첩 혐의’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감옥에서 볼셰비키와 접촉하고 『공산당 선언』, 레닌의 『유물론』ㆍ『경험비판론』 등을 탐독했다. 석방된 이후 볼셰비키세와의 연대를 통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8년】
- 4월,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체코프를 만났으며, 독일 포로장교와 회견을 갖고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柳東說), 김립(金立), 오성묵(吳成默), 오와실리, 이인섭(李仁燮)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창당하였으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년 6월 노령에서 박진순ㆍ박애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여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반일독립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19년】
-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전로국조선인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조직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 3월 3ㆍ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동휘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집결하였고 그해 4월 25일에는 같은 곳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 3인 사절단(朴鎭淳ㆍ朴愛ㆍ李榮漢)을 선정하여 곧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는데 이들 사절단은 한인사회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막대한 선전자금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 자금은 운반 도중(1919.9.10.) 일크스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에게 강탈당하고 말았다.
- 8월,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다. 상해임시정부 특사의 제안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국내 한성정부를 봉대하고 해산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이동휘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롭게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직을 수행하기 위해 한인사회당 세력들과 함께 상해로 향했다.
- 9월 18일 상해해 도착한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시국 문제에 대해 논의한 후 러시아 정부의 신임과 원조를 받는 데 합의하였다.
-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1920년】
- 5월,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이승만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무산되었고, 다음 달에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였다.
- 7월, 김립과 관련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국무총리에 복귀하였다.
- 8월, 한인사회당의 명칭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었으며, 책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1920년 말에는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에게 쫓겨 밀산(密山)을 거쳐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퇴각할 때 긴급구호금으로 1만 원을 보냈다.
【1921년】
- 1월에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이승만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무위원제를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이동휘의 주장을 채용되지 못했다.
- 독립운동의 방향성에서 마찰을 빚게 되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1921년 1월 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한 후 1921년 5월 20일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일후에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정식으로 출범시켰고, 레닌정부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간도ㆍ만주 방면에서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 1921년 6월 19일, 박진순, 홍도와 함께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선정되었다.
- 10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 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면담했다.
- 11월 28일, 상해파ㆍ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통합하기 위한 고려임시연합간부가 설치되었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 5월에는 치타에서 상해파·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한 임시연합간부회의에 참석하였다.
- 10월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통합당대회에 상해파 대표로 참석하고 집행부로 선임되었다.
-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상해파·이르쿠츠크파를 해산 후 코민테른 극동국 산하에 꼬르뷰로(고려총국)을 설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꼬르뷰로를 중심으로 한국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추진하고 하였다. 이동휘는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상해파를 대표하여 꼬르뷰로 위원이 되었다.
-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이동휘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민족독립이 최우선에 놓여 있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라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이동휘는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 4월에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국인 독립군단을 편성, 그 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 1923년 말경, 국제공산당 동양부가 한명세(韓明世)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자 꼬르뷰로 위원을 사퇴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1924년】
- 1924년 꼬르뷰로가 해산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당도서관으로 배치되었다. 한직이었지만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 블라디보스토크 스챤(蘇城) 근방의 한 촌에서 여생을 보냈다.
【1927년】
-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29년까지).
【1930년】
-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하였다(1935년까지).
【1935년】
- 1월 31일, 별세하였는데, 그의 사인에 대한 일설에는 1934년 12월 하바로브스크에서 개최된 시국강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날 밤 기숙사에서 공산당의 흉탄에 맞아 연해주에서 가료 중 사망했다고 한다.
- 유족으로는 1남 2녀가 있다.
- 1995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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