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정재홍(鄭在洪, 1867-1907) - 박영효 환영식 때 자결한 의사(義士)

정재홍(鄭在洪, 1867-1907)

 
대한제국기 이등박문 암살계획 실패 후 자결한 의사(義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이등박문 암살이라고 본다.
 
1867
 
  • 서울 출신. 원래 기개가 있어 민회(民會)에서 뽑혀 활동하였다.
 
1903
 
  •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
 
1905
 
  • 1905년 일본인 이토[伊藤博文]가 친일대신과 결탁하여 군대로써 왕궁을 위협하고 고종을 강요하여 을사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보호국화하자, 이토를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 우선 서울에 있던 미국청년회(美國靑年會)에 가입하고 기회를 노렸다.
 
1907
 
  • 1907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 1907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인천항의 사업가들이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1907이토 혹은 박영효 암살 계획
 
  • [이토 암살 계획]
    1907
    5월 이토가 조선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살해할 목적으로 여러 사람을 규합하여 연회를 마련하고 이토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토가 그 기미를 눈치채고 의심하여 참석하지 않게 됨으로써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거사계획 역시 점차 누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토에게서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을 알고는 원수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스스로 자결하였다.
    1907년 630일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박영효 환영대회가 열렸다. 장소는 북서(北署) 농상소(農桑所)였는데 왕년의 개화당 동지들이 부부동반하여 모여들었다. 환영회장 유성준, 위원 정운복이 축사를 낭독하고 연회에 들어가려 할 때 돌연 총성이 울렸다. 알고 보니 정재홍(鄭在洪)이라는 분이 권총자살을 시도한 것인데, 원래 이토가 모임에 나타나면 그 권총으로 사살하려 했던 것이다. 박영효가 이날 환영회에 병을 핑계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토도 나타날 리가 없었다. 정재홍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때 혼미한 가운데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품었던 우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대감(박영효)은 더욱 분발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朴成壽 精文硏 교수ㆍ한국사]
  • [박영효의 변절에 울분을 품은 자결]
    1907
    630일 서울 북서 농상소(農桑所)에서 열린 박영효의 귀국환영회를 거사 일로 잡았다. 명문가 출신 박영효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근대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지만,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07년 을사오적 박제순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아 귀국해 이완용 내각의 대신으로 일했다. 우국지사가 친일파로 변절한 순간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육혈포를 품에 숨긴 채 박영효의 귀국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환영회가 무르익을 무렵 연단에 올라 1천여명의 군중과 박영효 앞에서 자신의 복부를 향해 육혈포를 쏘았다. 정재홍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오후 8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저 대일본 보호 한국 국민 정재홍은 뜻이 있어 나라를 근심하는 우리 동포 모인 데 한 말씀 경고문을 삼가 드리노라.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그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에도 미치나 그러나 죽기 싫고 살기 좋은 인정이라 남으로 하여금 죽어 나의 살 명화를 도우려 하면 그 어찌 되리오 하나니 이곳에서 죽어 우리 동포 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게 하심이로다라 쓰여 있었다.
  • [암살 계획인가 순교자적 자결인가]
    그가 이토 또는 박영효를 암살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 희생이라는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 저격과 관련한 객관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단지 야사(野史)일 뿐 정사(正史)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정재홍의 죽음
 
  • 정재홍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천의 유지들은 그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며 곧바로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전국 각지 인사들이 추모에 동참했다. 저격의 대상자로 볼 수 있는 박영효조차 조의금 50환을 냈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동휘를 비롯해 윤치오, 김동완, 석진형 등 당대를 대표하는 계몽자강론자들이 참석했다.
  • 인천에서는 그의 죽음이 철시 운동과 일본인 가옥 방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무력 행위보다는 그가 씨앗을 뿌린 교육사업이 점차 확장됐다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사립학교 설립은 정재홍 사후 1년인 1908년 최전성기를 맞아 그해 명신학원, 흥인의숙, 명덕학원 등 7개의 사립학교가 개교했다.
 
정재홍의 가족
 
  •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해리(1895~1945)가 그의 첫째 아들인 정종화와 동일인이며,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가 정재홍의 처남이다. 인천의 유명한 연극인 정종원이 그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 첫째 아들 정종화는 11살 때 인천감리 서상집의 아들과 상하이로 건너가 대학을 마쳤고,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명학원에서 교편을 잡은 뒤, 상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둘재 아들 정종원은 정암이란 예명으로 희곡작가 진우촌, 무대장치가 원우전, 언론인 고일 등과 인천에서 연극운동을 했다. 고려영화사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 쌍옥루를 찍었다. 영화 낙화유수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정재홍에 대한 평가
 
  •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정재홍을 복원하는데 주력하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묵 연구위원은 정재홍을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천에서 계몽운동을 했고, 그가 설립한 인명학교가 창영초와 통합돼 나중에 인천 만세운동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인천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자결은 당시 대한자강회 등 계몽단체의 사회운동이 친일로 연결될지 모르는 때에 경종을 울린 의열투쟁이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였다.
 
2007
 
  •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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