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춘(李和春, 1871-1956)】
감리교 목사, 간도 선교사
【1871년】
- 2월 4일,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901년】
- 9월,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해 12월부터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고 사경회와 성경강습에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곧 매서인으로 순회전도 활동을 폈다.
【1904년】
- 9월부터 서울 청녕교(淸寧橋)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1905년】
- 9월부터 이천(伊川) 구역장을 지냈다(1907년 8월까지).
【1907년】
- 8월부터 개성남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1908년 8월까지).
【1908년】
- 9월 남감리회선교연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곧 북간도에 이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자원, 파송되었다. 이화춘 전도사와 매서인 이응현, 함주익 등 3명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어려운 여행 끝에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였다.
- 당시 용정촌에는 약 130호의 한국인이 거주하였는데, 특히 애국지사 박무림(朴茂林)이 열심히 교회일에 협조하였다. 용정촌을 선교기지로 인근 촌락 9개소의 예배처에 약 500여명의 교인을 얻어 날로 부흥케 되었다. 그러나 곧 장ㆍ감 양교파 사이에 이루어진 선교구역 분할협정에 의해 용정지역이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지역으로 이첩되어 캐나다선교사 푸트와 김영제(金永濟) 목사가 용정에 부임했다. 이에 이화춘 전도사는 감리교회의 전도실적 일체를 인계하고 귀국하였다.
【1909년】
- 9월부터 강원도 철원구역장으로 교회를 시무하면서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11년】
- 12월 20일 협성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2년】
- 9월 8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개성남부교회에서 3년간 시무하였다.
【1915년】
- 금화구역장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 9월부터 개성과 서울에서 순행목사(부흥사)로 활동하였다(1924년 8월까지).
【1924년】
- 9월 다시 북간도로 가서 농지역 관할목사로 8년 동안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 귀국하여 내금강교회에서 휴양하면서 시무하였다.
【1933년】
- 4월, 건강상 이유로 동부연회에서 자원퇴직하고 강릉에 거주하며 후에 교역자들의 목회를 후원하였다.
【1956년】
- 별세하였다.
- 유족으로는 부인 박노득과의 사이에 3남 1녀가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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