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9일 월요일

김약연(金躍淵, 1868-1942) - 명동학교 설립, 간민회 회장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교육가. 아호는 규암(圭巖). 최세평(崔世平)이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1868
 
  • 912, 함북 회령군 동촌 옹희면(雍熙面) 제일리행영(第一里行營)에서 김석조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 시인 윤동주의 외숙부이다. 여동생 김용과 미제 윤영석 사이에서 윤동주가 출생하였다.
 
1875
 
  • 8세 때인 1875년부터 10년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오삼열·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 때 선생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품성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여러 선생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온 마을의 모범 소년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이 시기 선생은 맹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가르치던 스승 남종구는 약연은 맹자를 만독(萬讀)해서 이제는 눈감고도 줄줄 욀 수 있으니 틀림없는 맹판(孟板)이야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899
 
  • 218, 가족을 데리고 북간도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으로 이주하여 한인부락을 형성하였다.
  • 1899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김정규(金定圭)ㆍ문정호(文政鎬)ㆍ문치정(文治政) 10여 가구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간도의 명동(明東)에 자리잡은 이들은 동가(董家)라는 중국인의 임야 수백 정보를 구입하여 개간을 서두르면서 한인 마을을 만들었다.
 
1901
 
  • 산야를 개척하는 동시에 1901년 자신의 아호를 따라 규암재(圭巖齋)를 창설하여 교민들의 교육과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1907
 
  • 김영학ㆍ강백규ㆍ구춘선ㆍ유찬희ㆍ마진 등 동지들과 함께 연변교민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8
 
  • 1906년 이상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서전의숙이 19079월에 폐교되자, 서전의숙에 적을 두었던 김약연의 종제인 김학연이 명동에 돌아오는 것을 계기로 1908427명동서숙을 설립하고 초대 숙감으로 활동하였다. 개교 당시 학생 수가 42명이었던 명동서숙은 명예숙장에 박무림(朴茂林),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교사에 김학연ㆍ남위언(南葦彦)ㆍ김하규(金河奎) 등이 교사로서 한문ㆍ수학ㆍ역사 등을 가르쳤다.
 
1909
 
  • 19094,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확대 발전시켜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서울 기독교청년학관을 나온 정재면 등 우수교사를 초빙하여 교육수준과 내용에 충실을 기함으로써 북간도에서의 민족교육의 토대를 구축하여 갔다.
 
1910
 
  • 19103, 명동학교에 중등교육과정으로 명동중학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한 뒤, 황의돈(黃義敦)ㆍ박태환(朴泰煥)ㆍ장지영(張志暎)ㆍ김철(金哲) 등 우수한 교사들을 초빙하여 민족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였다.
  • 19103월 중국지방당국의 인가를 받은 북간도 한인의 첫 사회단체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의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1911
 
  •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2
 
  • 연변교민회를 북간도 국민회로 개칭하여 그 회장이 되는 동시에 명동교회를 창설, 캐나다선교회를 유치하여 명동을 독립운동ㆍ교육ㆍ기독교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 명동학교와 명동교회가 자리잡고 있던 명동(明東)이란 명칭은 한민족의 독립을 상징하는 말로서 그가 직접 붙인 명칭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한국본토로부터 만주와 노령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며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출입하는 연락처였다.
 
1913
 
  • 4간민회(墾民會) 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어 한인 자치에 힘썼다. 간민회는 한인동포들에 대한 호구조사와 교육계몽사업은 물론 세금까지 매겨 징수하는 등 북간도의 한인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간민회는 원세개(袁世凱) 집권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지방자치기관의 철폐령과 일제의 집요한 압력으로 19143월 해산되고 말았다.)
 
1915
 
  • 장로가 되었다.
 
1918
 
  • 미주ㆍ노령ㆍ만주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이승만ㆍ이시영ㆍ김규식ㆍ박은식ㆍ김좌진ㆍ이동휘ㆍ이동녕 등 39명의 서명으로 무오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
 
  • 1919225일 간도 한인 대표로 러시아 니콜스크(Nicolsk)에서 열리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 후에 대한국민의회로 개칭)에 참석하였다.
  • 19193월 간도 용정(龍井)의 만세사건과 명동학교의 전소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간도로 돌아오던 중, 중국 정부에 연금되어 연길(延吉) 감옥에서 3년간 구금당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에 의하면 1920-1922년까지 연길 감옥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 선생을 비롯한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이 같은 용정만세시위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또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대소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통일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북간도의 통일적 독립운동단체로 그 해 3월 조선독립기성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구춘선이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선생은 의사(議事)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그 해 4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 정통성을 인정하여 국호와 단체의 이름이 서로 상충되지 않도록 단체명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23
 
  • 출옥 직후 선생은 1923226-27일 양일간 용정에서 개최된 전간도 주민대회에서 30만 간도 한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고, 나아가 간도 자치권획득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하여 중국 당국과 지속적으로 교섭활동을 벌이는 등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때문에 중국인들과 지방행정 당국자들은 선생을 한궈따충퉁(韓國大統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25
 
  • 명동중학교가 1925년 폐쇄당하고 캐나다선교부가 경영하는 은진중학교에 합병되었으나, 그는 다년간 은진중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1928
 
  •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
 
  • 19292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목사안수를 받고 명동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봉사에 힘썼다.
 
1937
 
  • 1937년 용정으로 이사온 뒤로는 은진중학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뒷바라지를 하였다.
 
1942
 
  • 19421029일 용정시 자택에서 선생은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스스로 개척하여 민족독립운동의 동량(棟梁)들을 배출하고, 이름 그대로 조국광복의 날을 밝혔던 명동 땅에 묻혔다.
  •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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