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0일 화요일

최중진 [崔重珍, 1870~1940] 자유교회 창설자

최중진(崔重珍, 1870-1940)

 
장로교 목사. 자치교회(자유교회) 창설자. 형평회(衡平會) 창설자.
 

1870
 
  • 최씨 세보는 최중진이 당시 정읍군 보림면 매계리(1914년 태인면으로 흡수됨) 출생이라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발원지 전북 고부군이라는 이설도 있다.
  • 어려서 정읍에서 성장하였으나, 가족을 이끌고 순창으로 이주하였다.
 
1894
 
  • 순창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였던 매부를 따라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
 
1899
 
  • 최중진은 동학농민운동이 관군, 청ㆍ일군에 진압된 후 1899년쯤 스스로 호남선교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인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를 찾아가 어머니, 동생 광진(훗날 전주서문교회 장로) 대진(제주 및 북간도 전도 목사)과 함께 입교한다.
  • 그는 동학농민혁명 발발시 천주교 초기 신자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 권위주의에 반발해 개종(뮈텔 대주교 기록)했다.
 
1901
 
  • 19018월 해리슨(하위렴) 선교사는 예배 출석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집 한 채를 사서 회집 장소로 개조했고 그들은 20리 떨어진 곳에 가 예배를 드린다고 전주선교부에 보고했다. 최중진의 아내 김선화가 중생 체험을 한 후 폭발적 부흥이 이뤄지자 테이트는 제일 오래된 교회로 가장 유망하다고 기록을 남겼다.
 
1904
 
  • 매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전북지방 초대 장로 중의 한 사람). [1906년에 장로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호남지방에서 최초의 목사후보생이 되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8
 
  •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2).
 
1907
 
  •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창설될 때 최중진은 호남지방대표로 임성옥ㆍ최홍서와 같이 참석하였으며, 그는 독노회의 정사위원과 학교과정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그는 독노회에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합동공의회 시대부터 전라대리위원부 총대로서 활동하였다.
 
1909
 
  • 9, 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읍, 태인 등지의 교회에 니즈벳(J. S. Nisbet) 선교사와 동사 목사로 임명되었다.
  • 그는 호남지방 출신으로서는 제1호 목사가 된 셈이다. 같이 안수를 받았던 김필수ㆍ윤식명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었고, 같이 입학했던 호남출신 김창국은 개인사정에 의해서 휴학을 하였기 때문에 졸업을 못하였다.
  • 최중진은 이미 테이트 선교사의 구역인 태인(泰仁)ㆍ매계(梅計)ㆍ정읍(井邑)ㆍ고부(古阜)지방에서 개교회를 돌보면서 전도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최중진 목사 자신은 늘 선교사의 정책에 끌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고, 또 선교사들이 주재하고 있던 전주와 군산만 여러 가지 혜택이 있음을 늘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낙후되어가기만 하는 자신의 고향인 태인ㆍ매계ㆍ정읍지방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욕과 또 민족교회를 만들고, 민족을 사랑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그의 철학과 신앙 때문에 자주 선교사들과 충돌이 있게 되었다. 물론 조사와 장로로 있을 때는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잘 알았기 때문에 선교사를 협력하는 일을 했었지만 목사가 된 이후부터 호남지방의 특출한 인물로 등장하였다.
  • 최중진은 태인, 매계, 정읍 지역 교회를 돌보다가 그 지역에서 선교하는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세례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선교 재정의 사용에도 지역적 차별을 두는 것에 불만을 품고, 5개 항의 개선 요구 편지를 보내고 만약 그 가운데 한 항목이라도 거부하면 자신은 독립하겠다고 통고하였다. 5개 요구 조항은 원입교인에 대한 엄격한 규율을 폐지하고 학습인으로 세워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할 것, 군산지방으로 편입시킨 부안지방을 자신의 지역으로 돌려주고, 고창지방도 자신에게 맡길 것, 자신의 지역에 중등학교를 세워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교회마다 상구위원(常救委員) 2인씩을 두어 구제할 것, 자신에게 집 한 채를 사주어 선교 사업에 재정적 어려움이 없도록 할 것 등이었다.
 
1910
 
  • 15, 전주에서 모이는 전라대리회에 그가 불참한 데서부터 그의 자유교회 선언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불참의 이유는 자신이 내세운 5개 조항을 자유롭게 토론해서 그 일이 실현되기를 바랐으며, 5개항 중 하나만이라도 관철되지 않으면 독립교회를 세우겠다고 결심한 데 있었다.
  • 191015일에 열린 전라북도대리회는 최중진이 불참한 가운데 이 문제를 토론하고 이 일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로 정죄하여 125일 열릴 대리회에 출석하여 해명하고 대리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당회권리를 행사하지 말라고 17일자로 통지하였다.
  • 최중진은 110일자로 대한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의 명의로 반박 답장을 보내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대리회에서는 김필수 목사, 맥커천(L. O. McCutchen) 선교사, 서영선 장로 등을 파견하여 권면하였다. 전북대리회에서는 자유교회 선언의 서신을 접한 후 화해위원을 선정하였지만 모두가 무위로 끝나버렸다. 특히 최중진 목사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자유교회가 육신적으로는 한 교회안에서 일하지 못할지라도 앞으로 장로교회를 모교회로 섬기며, 장로교회가 엄한 규칙을 바꾸는 날에는 언제든지 다시 화합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 이에 대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특히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 선교사는 대리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서로 자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여 좋은 사상이 나오도록 권면하고 화목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때 대리회에서는 김필수ㆍ서영선ㆍ매큐첸(L. O. McCutchen, 마로덕) 등을 최중진 목사에게 보내 그를 위로하고 권면하여 화합하기로 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222일 임시대리회를 열어 회개하기까지 휴직처분을 결의하고 같은 해 9월에 열린 제4회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독로회)에도 보고하여 혁직(革職)”을 결의하였다.
  • 이리하여 최중진 목사는 자신이 테이트 선교사와 같이 관장했던 정읍ㆍ매계ㆍ고부 등 12개처 교회를 자유교회로 선언하고 나섰으며, 이외에도 부안지방에 있는 교회도 자유교회로 넘어갔다. 이 일로 인하여 대리회측과 최중진 목사와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 이리하여 대리회는 1910년 전주에서 모이는 임시대리회에서 휴직을 결의하고 제4회 독노회에서 정사위원인 최중진 목사를 휴직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로 휴직 목사가 되었다.
 
1914
 
  • 최중진은 동생 최대진 목사와 여러 동역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19148월 제4회 전라노회 계속회에서 노회원들 앞에서 회개하고, 10월 계속회에서 강도사로 강등하여 다시 임명되었지만, 1년이 못되어 다시 자유교회를 이끌고 장로회를 떠났다.
 
1910년대 후반
 
  • 1910년대 후반 정읍, 전주, 개성의 조합교회 목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19년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조합교회에서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 그는 당시 천대를 받고 있던 하류급에 속한 백정, 산지기 등을 모아 형평운동을 전개했으며, 친히 회장으로 취임하여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였다.
  • 그는 평소에 선교부로부터 학교를 자신의 선교지였던 매계리에 세우기를 원했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이 목회하고 있던 매계교회 내에 중학교를 세우고 청소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고, 또 그가 세웠던 매계교회는 1천명의 신도가 모였지만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자 교회 재산권 문제로 오랫동안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매계교회는 차차 싸움이 가열되자 종래는 문을 닫고 최중진은 정읍으로 자리를 옮겨 조선일보사 정읍지국장을 역임한 일이 있다.
  • 최중진 목사의 사상 속에는 자기 의식과 내 민족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남달리 강하였다. 그 한 예로, 목포세관에서 부당하게 세금을 거두는 일본세관원에게 항의하다가 붙잡혀 광주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한 일도 있다.
  • 또한 그는 정읍 내에 있는 노동자를 규합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노동자 권익에 앞장서는 일도 하였다.
 
1927
 
  • 19274월 신간회 정읍지회 설립 준비위원, 동년 7월에는 정읍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
 
  •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1930년 봄 정읍지역 부흥회를 이끌 때 심령이 녹아날 듯하여 견딜 수 없었다며 개심했다. 당시 기독신보‘(최중진이) 통회한 후 장로교회로 돌아와 역사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 그리고 전주서문교회 복귀를 준비하던 중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별세했다. 매계교회는 1929년 복원됐다. 지금은 설립자 최중진 목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교회 마당에 세워졌다.
 
1940
 
  • 70세로 별세하였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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