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李容九, 1868-1912)】
대한제국기 동학의 일파인 시천교를 창립한 종교창시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이다. 동학교인으로서 도호는 지암(智菴)이고, 시천교 교주로서 도호는 봉암(鳳菴)이다. 초명은 우필(愚弼)이고, 뒤에 상옥(祥玉, 相玉, 尙玉)ㆍ만식(萬植)ㆍ성순(聖順)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아들이 1938년 11월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를 조직한 이석규(李碩奎)다.
【1868년】
- 1868년 1월 21일 경상도 상주에서 출생했다.
【1886년】
- 19세에 청주로 이주하였다.
【1887년】
- 20세에 충주군 황산리로 이주하였다.
【1890년】
-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孫秉熙) 등과 함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고제(高弟,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1893년】
- 1893년 충청도 보은에서 열린 동학 집회에 참석하였다.
【1894년】
-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에서 충청도 청주에서 기포(起包)하여 호서군(湖西軍)으로 합세했다.
-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접계통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농민군 수천 명을 모아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했으며, 남북접이 연합하여 공주전투를 벌일 때는 손병희의 참모장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최시형을 따라 강원도로 도주했는데, 그 와중에도 최시형의 지시로 함경도ㆍ평안도ㆍ황해도 등지로 다니며 동학포덕에 열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는 당시 동학의 확연함에 끝까지 함께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 1898년 1월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사형을 면하고 출옥되었다.
- 1898년 최시형이 잡혀 교수형에 처해진 뒤 이용구도 경기도 이천에서 잡혀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며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동학교도 수십 명이 감옥을 습격해서 그를 구출해냈다는 것은 그가 동학 내에서 갖고 있는 위상과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1901년】
- 최시형이 처형된 후 제3세 교주가 된 손병희를 따라 1901년 3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3년】
- 1903년 손병희의 지령을 받아 귀국하여 포교활동을 벌였다.
- 일본 망명 중에도 동학의 재건을 위해 한국 내 민회(民會) 설립을 주도하는데, 그 결과 중 하나였던 중립회(中立會)가 진보회로 바뀌기 전까지 이용구는 ‘만식’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손병희는 그에게 ‘용구(容九)’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먼저 귀국하여 진보회에 관한 것을 일임하며 이를 주간하게 하였다. 용구(容九)라는 이름에서 ‘九’는 1대 교주 최제우가 한글로 지은 포교 가사집이자 동경대전과 함께 동학의 기본경전인 「용담유사(龍膽遺嗣)」의 9편 가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9편 가사를 담고있는 사람, 의미심장한 이름이자 이용구에 대한 손병희의 평가와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1904년】
- 1904년 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각지에 산재한 동학교도 세력규합에 힘썼다.
- 12월 진보회를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에 통합해 13도 총회장으로 취임했다.
- 이용구는 「대동합방론」의 이론인 한국과 일본이 일방(一邦)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가 이런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정부의 무능력과 정치ㆍ경제적 혼란, 동학에 여전히 자행되는 탄압과 대비해 러시아를 상대로 연일 승전하는 일본을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자 신뢰할 대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과의 잦은 교류 역시 크게 한 몫을 했다. 한국내에서의 공격으로 생존자체가 위협받는 상황 즉 한국사회의 지배층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원호를 받는다는 것은 이용구로서는 진보회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로 판단하였다. 손병희도 이런 이유 때문에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동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1905년】
- 1905년 5월 일진회가 설립한 광무학교 교장을 겸했고, 6월부터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을 돕기 위해 일진회원을 동원해 북진수송대(北進輸送隊)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러시아군을 정탐하며 일본군 이동을 위한 철도부설 등을 맡았다. 9월 일진회 지방총장이 되었다.
- 일진회가 동학교도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나선 이유는 러일전쟁의 승기가 이미 일본으로 기울었으며, 1905년 1월 친러내각인 신기선 내각이 붕괴한 후, 1905년 6월 심상훈 내각으로부터 ‘관민합동통치’의 약속을 받아낸 ‘관민협조방침’을 발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공격적인 탄압을 가했던 대한제국 정권과 이정도의 타협을 이끌어 낸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실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12월부터 일진회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 같은 해 11월 5일 을사조약 체결에 앞서 송병준과 함께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 발표를 주도했고, 12월 22일 윤시병(尹始炳)의 뒤를 이어 일진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1905년 12월 1일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며 동학을 일진회와 분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여, 1906년 9월 천도교에서 이용구를 포함한 62명을 출교(黜敎)하자 11월 시천교를 창설하고 교주가 되었다.
【1907년】
-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 문제가 불거지자 송병준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는데 앞장서서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궁궐 밖에서 시위하도록 하였다. 7월 고종 강제양위와 8월 군대해산이 진행되며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격렬해지자, 그해 9월 일진회 특별총회에서 의병진압의 당위성을 강조한 「거의선언서(擧義宣言書)」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도록 노력했다. 11월 일진회원이 의병토벌에 나서는 것을 독려하기 위한 자위단원호회(自衛團援護會)를 만들어 순회총부장을 맡아 전국 순회를 하며 일진회원이 자위단을 조직하도록 했다.
- 그해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9년】
-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날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거느리고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
- 1909년 12월 “한일 양국이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진회합방성명서」를 작성하여 순종, 통감부, 내각에 상주하고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했다. 이후 일진회가 앞장서서 ‘합방청원운동’을 벌이며 적극적인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1910년】
-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될 때 강제 병합에 앞장선 공로로 해산비 5,000원과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1912년】
- 1912년 5월 22일 지병인 결핵으로 일본 스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일왕으로부터 ‘훈1등서보장’을 받았다. 살아있는 이용구는 협조를 대가로 항상 권력의 분담 혹은 자치를 요구한 다소 귀찮은 존재였고, 그로 인해 합방 후 버림받았지만, 죽은 이용구는 친일파의 귀감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용구는 죽는 순간까지 일본에게 이용당한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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