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 반대운동 – 기독교인들 ‘성토일진회문’】
1909년 9월초에 시작되어 ‘國民團結’(국민단결)과 ‘國利民福’(국리민복)을 내세운 대한협회와 일진회의 연결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26일 安重根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되어 일제의 한국병합정책은 급진전되었다.
일진회는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대한협회와 공동으로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했으나, 대한협회가 거부함에 따라 12월 4일 단독으로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고, 3차에 걸처 한일합방 상소를 올리는 한편, 정부와 통감에게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일진회의 매국적 합방성명은 전국민의 분노를 일으켜,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상소와 연설 및 격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한협회는 12월 4일 일진회와의 분립을 선언하고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반대 성토하였다. 12월 5일에 대한협회ㆍ漢城府民會ㆍ國是遊說團ㆍ흥사단 등 정치ㆍ사회 단체의 회원들은 원각사에서 臨時國民大演說會를 개최하여,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성토하였다. 한편 대한협회는 각 단체 연합하의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한성부민회에서 열기로 예정된 각 단체 연합의 국민대회는 警視廳의 집회금지령에 따라 원천 봉쇄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협회는 기관지인≪대한민보≫를 통하여 일진회를 성토하고,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관망적 태도를 취하는 이완용 내각을 비판하는 등 합방반대 감정을 고무하였다.
일진회의 합방상소에 접하여 애국계몽언론인 ≪대한매일신보≫는 “일진회가 이미 일본인이 되었다”고 규정했으며, 12월 8일자 논설<再告 韓國同胞>에서는 매국적 일진회의 죄악사를 폭로 규탄하고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천도교는 교도들에게 일진회 반대 성명문을 배포하여 일진회의 망동을 규탄했고, 기독교인 김창환ㆍ배동현(裵東鉉)ㆍ이승규(李昇圭)ㆍ오상근(吳祥根) 등은 ‘일진회 성토문’에서 한일합방은 “政合邦이오 合倂이 아니라”는 기만적인 일진회의 성명서를 성토했으며, 구세군에서도 전도회를 통하여 노예적 합방을 반대하였다. 한성부민회는 내각에 보낸 건의서를 통하여 일진회의 해산과 국민신보사의 폐쇄를 주장하였다. 유학생들로 조직된 大韓興學會에서도 대표 2명을 귀국시켜 일진회의 합방성명서 발표에 대한 성토문을 반포하였다가 경시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대한 반대운동은 전국 각 지방으로 번졌다. 12월 8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성토했고, 대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대한협회 평양지회와 서북학회 평양지회도 합방반대를 결의하였다. 14일 평북 선천에서는 2천여 군민이 군의 客舍 앞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일진회 박멸을 결의했으며, 16일 평북 철산에서는 대한협회 회원들이 시장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일진회의 즉시 해산을 요구하는 電文을 정부에 발송하였다. 17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대한협회 회원과 변호사ㆍ학교 교사들이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계획했는데, 190명이 서명한 대회선언문은 “國賊 일진회를 규탄하고 전국에 성토의 義聲을 공포한다”고 하였다. 1910년 1월 3일 평북 영변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400여 명의 읍민이 보통학교 교정에 모여 일진회의 합방상소를 규탄하고 이용구의 죄목을 나열하였다. 일진회의 매국행위와 합방에 반대하는 성토는 1910년 봄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애국계몽단체들과 온 국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진회의 합방책동은 한동안 무산되었다. 한말에 많은 단체들이 등장하여 사회의 개명진보와 국가민족의 안녕을 주장하며 활동하였다. 비슷한 구호를 주장하는 애국계몽단체와 친일매국단체를 구분하기에 모호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상식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대한협회처럼 자강독립의 노선를 걸은 단체는 애국계몽단체로 분류되고, 일진회처럼 한일합방의 노선을 걸은 단체는 친일매국단체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참고]
우리역사넷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