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가이치(會田嘉伊智, 1867-1962)】
【1867년】
-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소네무라(曾根)에서 출생하였다.
- 소다에게는 3인의 형제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오카야마의 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89년】
- 장남이었던 소다는 의사였던 동생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21세가 되던 해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다른 한 동생 역시 개척기의 홋카이도(北海道)로 가서 큰 목장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 면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소다는 공부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개항된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탄광에서 일하며 초등교사 자격증을 얻어 교사가 되었다.
【1893년】
- 25세가 되던 해인 1893년에는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영어를 익혔다.
【1895년】
-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그곳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 사무원 겸 통역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로 가서 해군에도 종사하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을 만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였다.
【1899년】
- 30대에 접어들자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는데, 1899년 술에 취해 노상에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무명의 한국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어준 사실이 있었다.
【1905년】
-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한국에 입국하여 서울 YMCA 일본어 교사로 취직을 하였다.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는 이상재ㆍ윤치호ㆍ이승만ㆍ김정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활기를 찾을 무렵이었다.
- 소다가 한국에 살게 된 것은 1905년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YMCA에서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약 10년간을 지냈다.
【1907년】
- 1907년 8월 소다는 평양에서 개최된 기독교 집회에 참석하여 소위 ‘리바이벌’이라고 하는 신앙회복이 일어나게 되었다. 소다는 이 무렵, 수감 중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풀려나온 월남 이상재에게 크게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다. 다음은 생전 그를 잘 알았던 전택부 목사의 증언이다.
“소다 전도사는 젊을 때 대주가였어요. ‘혈기왕성해 난폭한 짓을 많이 했다’고 말하곤 했죠.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YMCA집회 참석과 이상재 선생 영향으로 신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만구령운동 당시 ‘동포여, 경성하라’는 전도지를 뿌렸는데 적극적으로 나서 복음을 전했죠.” - 금주회 회장도 역임한 소다에게 기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상재의 영향은 컸다. 월남 이상재는 YMCA 총무로 “동포여, 경성하라”고 외치며 많은 사경회와 부흥회를 개최하여 백만인 구령운동을 할 때 소다는 성경을 배우고 집회에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 훗날 소다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기독교 입문으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디 목사, 무라다 목사, 기하라 목사 등이다. 그리고 동시에 망국 조선인에 대한 공감과 ‘언론 자유’로 학생들의 배일사상을 모른 척해주며 종로 청년회 건물을 세운 인물로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김규식, 소다 자신은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서 동등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1908년】
- 1908년 일본인 초등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일신 초등학교의 전신) 교사이자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 교사를 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 우에노 타키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더욱더 신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 여학교 교사와 고아원 보모로 헌신한 우에노 타키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조선에 입국하여 히노데 소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히노데 소학교는 고종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다닌 곳이다. 부인도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 소다는 리바이벌에 의한 갱생 후 당시 경성에 있던 메소디스트파의 선교사 해리스 씨에게 추천되어 평신도 전도자(정주 전도사로 불림)가 되어 교회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것과 함께 기독교 서점을 경영하면서 ‘성서판독전도’를 위한 활동도 하였다. 성서판독전도라고 하는 것은 집에서 집을 방문하면서 하는 전도로서 이것은 매우 인내를 요하는 고생이 큰 일이었다. 소다는 이 일을 약 10년간 하였다.
[소다는 회심한 후 메소디스트파의 선교사 해리스에게 추천되어 평신도 전도자(정주전도사로 불림)가 되어 교회에 봉사하게 되었는데 해리스라는 인물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메소디스트파 감독으로 파견되어 훗날 메소디스트파의 스크랜톤이 1907년 ‘극친일파’ 해리스 감독의 통제와 간섭에 반발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직을 옮기게 된 계기가 된 인물이다.([이수정 마가복음 성경번역 130주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 가족을 떠나 동료 선교사 곁에 눕다, 국민일보 2015. 7. 25) 또한 훗날 이승만이 미국으로 갔을 때 이승만을 돕기 위해 해리스의 도움을 청하고자 하였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간 후 해리스를 ‘친일파’로 불렀다고 회고한 바 있다.] - 한편 타키 부인은 결혼 후에도 계속하여 미션 스쿨에서 교편을 잡고 퇴직시까지 계속하였다. 또한 기독교 서점의 경영은 타키 부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1911년】
-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게 되었다. 윤치호와 양전모는 10년 징역형을, 이승만, 김규식은 망명하게 되었다. 소다는 동료들을 위해서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를 찾아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소다는 이미 YMCA의 직을 그만두고 있었지만 협력자와 함께 경찰서를 돌며 서장을 설득하고 투옥된 YMCA의 회원을 도왔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도 알려져 회현동에는 일본인 감리교회가 설립되어 소다가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1913년】
- 러일전쟁 후 사회적 불안과 경제 불황으로 고아들이 많아졌다.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郎)는, 1896년 가마쿠라보육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가마쿠라보육원을 설립한지 17년 후인 1913년 8월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를 설립하고 운영을 시작하였다.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는 가마쿠라보육원의 설립자인 사다케오토지로의 기독교박애주의 정신으로부터 헌신희생의 정신을 기초로 설립되었다]
【1917년】
- 총독부로부터 삼판동(현 후암동) 이왕가 소유의 1천여평 대지와 건물을 대여받아 고아원을 세웠다.
【1921년】
- 1921년 소다 전도사는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이들 부부의 고아들을 위한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가마쿠라 보육원은 1896년 일본인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郎)가 세웠으며 경성지부는 1913년 무렵 설립되었다. 보육원(현 영락보린원)은 총독부가 대여한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1천 200평의 대지 위에 세워졌다. [사다케 오토지로의 가마쿠라 보육원 지부 설립의 계기가 해리스의 친일적 사고와 조선재건이라는 식민 사상, 일시동인과 동화라는 데서 설립되었다는 점 등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부분은 많다.]
- 소다 부부는 해방 전까지 무려 천여명의 한국 고아들을 길러냈다. 그들은 한국의 ‘하늘 할아버지, 하늘 할머니’로 불렸다.
- 소다 부부의 활동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에서 수용한 고아의 수는 1913년부터 1945년까지 30여년간 1100명 이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다액의 경비를 필요로 하였지만 그 조달을 위해 매우 고생을 하고 있었다. 총독부와 경성부로부터 조성금과 위탁비, 일본의 가마쿠라 보육원 본부로부터의 부담금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하였다. 민간유지와 교회기관, 친구들로부터의 기부금을 필요로 하였다. 이를 위해 소다 부부는 거의 한국 전토의 교회와 신도를 방문하여 기부금을 모았다. 또한 조선 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어 체포된 보육원 출신자가 나올 때마다 두 사람은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 부부는 일본인들과 위정자의 피정복자 입장에 놓여진 한국인에 대한 냉혹한 행동과 그 심리 안에 있는 우월감을 볼 때마다 참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어떨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도 느꼈다. 그 기분을 고아 구제 사업에 발산시켰던 것이다.
【1919년】
- 3ㆍ1운동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 투옥되자 소다는 이에 분개하여 당시 대법원장 와타나베를 찾아가 석방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 일제의 불의와 만행을 맹렬히 공격하자 총독부는 그를 ‘간사한 놈’, ‘한국인 앞잡이’ 등으로 몰아붙였다.
- 훗날 악질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위장한 자선가’, ‘매국노’ 라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본인 뿐 아니라 한국인으로부터도 총독부의 개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고 ‘고등걸식’이라고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1926년】
- 부인인 다키도 이화여전ㆍ숙명여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보육원 보모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30년】
- 소다가이치가 보육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지만 경성지부로부터 떠나지 않고 재단의 운영은 이사보의 사다케 오토지로가 맡았다.
【1936년】
- 이사를 퇴임하고 이사보로서 지속하여 경성지부 주임을 맡았다.
【1938년】
- 총독부로부터 차용하고 있던 지부의 토지건물이 재단에 양도되었다.
【1941년】
- 소다가이치는 1941년 77세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를 은퇴한다. 후임 지부장(원장)에는 초대 지부장이었던 스다겐타로(須田権太郎)가 근무를 시작한다. 그러나 부인 다키 여사는 시설에 계속근무하면서 교회의 전도사로서 근무한다.
【1943년】
- 1943년 가을에 부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소다는 함경도 원산 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1945년】
-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당시 소다는 함경도 원산 감리교회 전도사였다. 해방 정국에서 ‘독립만세’, ‘일본인은 돌아가라’, ‘일본인을 죽이자’라는 포스터와 슬로건이 횡행했던 시기, 소다 부부는 남은 고아들을 위해 3개의 시설로 분산시켜 보냈으나 고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등 이들의 처치를 위해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아동 구제 사업을 벌이던 이들 부부가 남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 부부가 한국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서울에 영주하도록 된 것을 안 일본인은 어떤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멸하였다. 그들은 모두 다년간 노력하여 얻은 일절의 자산을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일본 동포를 보내야 하는 소다부부는 자신들만이 받은 은혜를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심정이었다. 이것이 이윽고 소다로 하여금 안주의 서울을 떠나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 복음 선교의 여행을 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 것이다.
【1947년】
- 전후 격동기 80세가 된 소다씨는 일대 큰 결심을 하였다. 조국 일본이 패전에 의해 황폐해진 것을 보고, 일본이 전쟁에 지고 미증유의 고난을 받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통감하고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고아들을 위해 부인을 서울에 남기고 단신으로 귀국하였다.
- 일본으로 돌아온 소다는 성경을 손에 쥐고 ‘세계 평화’라고 적힌 띠를 두르고서 일본 전국에 전도 여행을 하며 믿지 않는 영혼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일본 언론이 ‘조국 전도를 위해 귀국’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그에게 전도 이유를 묻자 “우리 모두 예수를 믿을 특권과 그분을 위해 고난당하는 특권, 또 섬기는 특권을 받았다. 한일 친선은 이루어질 것이다. 경성에만 한국인과 결혼한 여성이 700~800명이다. 재일 한국인 60만 명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조금 더 올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장차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라고 답했다.
- 1947년 11월에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그는 이후 12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돌며 방문과 전도를 계속하였다. 그 동안 소두도 교회의 목사 대리를 하거나 명석의 노인홈에 살면서 전도하기도 하였다.
【1950년】
- 부인은 한국에 남아 계속 고아들을 돌보다 1950년 1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다(급성 폐암). 당시 김명선(金鳴善) 등의 노력으로 한국사회사업연합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당시 소다는 차가운 한일 관계로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을 못하였지만, 도리어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 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는 당시 소다의 심회를 전택부는 기록했다.
【1960년】
- 1960년 1월 아사히 신문은 특별기사로서 93세의 소다씨가 당시의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내는 귀국을 요청하는 기사를 소개하였다. 그 표제는 ‘당신은 이 백발 수염의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으로 큰 얼굴 사진이 들어간 소다를 소개하고 한국에 귀국하고 싶어하는 노인의 염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하는 요청이 8단 정도의 특대기사로 쓰여졌다. 이 기사가 근간이 되어 일본과 한국에서 그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요청한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9일에 일어난 혁명에 의해 실각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1년】
- 그 후 재일 한국인의 관계자와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의 후신이라고 말할 영락보린원의 원장이자 영락교회의 목사인 한경직 목사들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윽고 1961년 3월에 극적인 한국귀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62년】
- 서울에 돌아온 그는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아직 일본과의 정식 수교 전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서울 YMCA에서 거행된 그의 추도식을 앞두고 반일 감정 때문에 협박 편지 등이 이어졌으나 한국 교계는 “아무리 일본인이라도 우리 민족에 은혜를 끼친 사람이면 보답하는 것이 아니냐.”라며 물리쳤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영락보린원ㆍYMCAㆍ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ㆍ한국사회복지사업전국연합회 등 19개 단체 연합의 사회장으로 시민회관에서 엄수되었다.]
- 부인과 합장된 소다의 묘비 뒷면에는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 수천이더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라 써져있다. [5백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일본인의 유골은 소다가이치 1명이다.]
- 소다가 서거하자 추도식이 일본에서도 거행되었다. 서거 1개월 후 4월 28일 아오야마 학원 대학 본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추도식은 일본 NCC, 가마쿠라 보육원, 감리교회, 재일 한국 YMCA 등 10여개 단체 공동 주최로 거행되었다. 당시 한일 관계가 험악했는데 한일 양국에서 존경받았던 소다가 다리가 되어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2주기 추모식은 서울 YMCA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소다의 고향 사람으로 소다를 매우 존경하였을 뿐 아니라 친히 추도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자신의 딸 등을 특사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 흥남철수 대작전 때 미군을 설득해 9만 2천여명의 피난민을 탈출시킨 전쟁 영웅 현봉학은 후암동의 소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마쿠라 보육원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소다 부부를 통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식민지 청년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 소다 할아버지 내외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김범수, 영락보린원(永楽保隣院)의 역사연구 : 가마쿠라(鎌倉)보육원 경성지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역사학회, 사회복지역사연구 제1권 제1호, 2018.11, 26-46
김보림,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의 삶과 그 역사적 평가 분석,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제58호(2020.04), 241-266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