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간도 용정시에 설립된 기독교학교.
[1913년]
- 1913년 4월 1일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여학교로 설립자 겸 초대 교장은 바커 부인(A. H. Barker, 朴惠善)이었고, 초디 교사는 강봉우ㆍ신가준 등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명신여학교는 6월 4일 설립되었다]
- 1913년 캐나다 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파송되어 용정에 부임한 캐나다 선교사 박걸의 부인 레베카는 “유교의 질곡에 얽매인 조선의 여성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여성들로 하여금 학문을 익히게 하고 견식을 넓혀 그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자각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여성교육과 여성 지위 향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4년]
- 1924년 명신여중을 개설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920년에 명신여자중학교로 승격되었다. “1920년 6월 캐나다 선교협의회는 당시 교장이었던 영국 선교사 게투르스ㆍ챠스나씨를 통해 기존의 명신여학교를 중학교로 승격시켜 명신여자중학교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1931년]
- 1931년 강당ㆍ기숙사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 교사를 지음과 동시에 부속국민학교를 가진 큰 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 바커 부인의 후임으로 역대 교장에 샌들(A. Sandell, 奇愛時) 양, 맥밀란(Kare McMillan, 麥美蘭) 양, 본윅크(Francis Bonwick, 班富連) 양 등이었으며, 유공자 및 역대 주교 교사로는 신가준ㆍ강봉우 외에 김두식ㆍ장윤철ㆍ김종열ㆍ박성덕ㆍ한덕일ㆍ박마리아ㆍ김성환ㆍ최진실ㆍ김정신ㆍ이정식ㆍ서진숙 등을 들 수 있다.
[1938년]
- 새법령에 순종하여 등록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사립학교들이 만주국 정부의 새법령 아래 놓이게 되었고, 1938년 명신여자중학교는 새 법령에 순종하여 등록신청서를 접수하던지 아니면 학교인가를 취소하던지의 여부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결국 등록신청서는 접수되었고 1938년 5월 허가서가 나왔다.
[1940년]
- 1940년 명신여자고등학교로 승격되었다.
[1941년]
- 1941년 봄이 되자 설립자인 캐나다인들이 용정에서 철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후 명신여자중학교의 교학활동은 조선인 교장 이두섭의 지휘 아래 정상적인 궤도로 진입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1943년]
- 1943년 이후 명신여자중학교는 당국의 압력으로 용정 시내에 있는 다른 여자중학교와 병합되었고 일본인 새 교장이 부임하게 됨에 따라 식민지교육기관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 광복 후인 1945년 9월에 다시 명신여자중학교로 회복되었다.
[1946년]
- 1946년 9월 16일 용정에 있는 다른 5개의 중학교와 함께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
[1968년]
- 해방 후에 월남한 약 150명의 졸업생들은 1968년 7월 13일 명신동창회를 조직하였는데, 역대 회장은 박종순ㆍ장덕희, 총무는 황영재 등이다. 유한양행의 주식 1,865주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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