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9일 월요일

이승훈 [李昇薰, 1864~1930] 민족대표 33인, 오산학교 설립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오산학교 교장, 기독교 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1864
 
  • 325,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서 이석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 본명 인환(寅煥), 아명 승일(昇一), 호는 남강(南岡)이다.
 
1869
 
  • 6세 때 맏형 승모(承模)를 따라 납청정(納淸亭)으로 이거하였다.
 
1870
 
  • 7세 때 납정청의 사숙에 입학하여 한학을 수학
 
1873
 
  • 10세 때 부친 이석주 사망
 
1874
 
  • 같은 동네 유기상 임일권의 집에서 사환으로 취직하였다(4년 동안 일하였고 두터운 신임을 받아 수금원이 되었다).
 
1878
 
  • 같은 동네 이도제의 딸 이경강(李敬康)과 결혼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이경선’(李敬善)으로 되어있다.
 
1879
 
  • 황해도 안악ㆍ봉산 등지를 떠돌며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887
 
  • 납정청으로 돌아와 개인점포를 개점, 평양에는 지점을 두는 등 활발한 상업활동을 하였다.
  •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해, 첫째 노동환경을 일신했고, 둘째 근로조건개선에 힘썼으며, 셋째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을 북돋아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1894
 
  • 청일전쟁으로 폐점하고 덕천 산골에 피신하였다.
 
1895
 
  • 청정동으로 돌아와 철산 오희순(吳熙淳)씨의 후원으로 다시 상업을 계속하였다.
 
1899
 
  • 용동(龍洞)으로 이주한 뒤 서숙을 개설하고 승훈제를 후원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1901
 
  • 선천 오희순(吳熙淳)의 지원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 서울과 인천에 진출하여 외국에서 들어오는 석유ㆍ양약 등을 매점방매하는 무역사업에 투신하니 순이익만 50만량이 넘었으며 사업가 이승훈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ㆍ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2
 
  • 1만냥의 엽전을 실은 배가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이승훈은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소송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얽혀 1년이 지난 뒤에야 원가만 받는 것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선생은 1년간의 소송으로 장사의 적기를 놓쳤고, 또 소송에 매달리는 바람에 사업도 제대로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1905
 
  • 만주무역 관계로 영구와 대련에 다녀왔다.
 
1906
 
  • 무역계로부터 은퇴, 용동 서숙에서 경서 읽음
 
1907
 
  • 7, 안창호를 만났다. 평양 모란봉 밑에서 수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안창호를 만나 국가사업에 이바지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대 생활전환을 했다. 용동에 있는 서숙을 증축 수리하여 강명(講明)의숙을 설립하는 한편 이종성ㆍ이치순ㆍ조형균ㆍ백양녀 등과 협력하여 3백석 추수의 향토지를 기금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 설립
  • 서적과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 서점 영영
  • 1224, 오산학교를 설립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124일로 언급한다).
 
1908
 
  • 향교재산을 유림원에게 되돌려주고 사유 토지를 털어 학교를 경영하고,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하여 숙련공 양성하였다.
 
1910
 
  • 9,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회 설립에 힘쓰는 한편, 그의 육영사업 방향을 기독교 정신에 둠으로써 오산학교 교장에 로버츠(羅富悅)가 취임하였다.
  •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1911
 
  • 2,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당한 후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 9,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
 
  • 10년 징역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13
 
  •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옥중에서 신약성서를 1백회 독파하였다고 한다)
 
1915
 
  • 2,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
 
  •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8
 
  • 토오코오와 상해로부터 독립운동의 밀의에 접하여 31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
 
  • 26, 상해 신한청년당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받음
  • 211, 김성수의 집에서 송진우와 만났다. 기독교측의 동지를 구하는 일을 맡은 최남선이 211일 사람을 중계하여 이승훈을 오산학교 경영의 구실로 상경케 하였는데, 이때 최남선은 일본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송진우로 하여금 김성수의 집에서 그를 만나게 하여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규합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즉각 찬성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당일로 서울을 떠나 선천으로 갔다.
  • 212, 장로교 목사의 양전백의 집에서 이명룡ㆍ유여대ㆍ김병조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유여대와 김병조의 인장을 위탁받고, 양전백과 이명룡에게는 상경하도록 하였다.
  • 214, 평양의 기홀 병원에서 길선주, 신홍식에게 독립운동의 계획을 알림
  • 220,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파 목사 오화영, 정춘수, 오기선, 신홍식 등과 만났다. 서울 및 각 지방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고, 정춘수로 하여금 원산 방면을 담당케 하였다.
  • 221, 최린의 집에서, 최남선ㆍ최린과 만나 전날 밤 박희도의 집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들이 모여, 기독교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동지들과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다시 세브란스 병원 내의 이갑성 처소에서, 박희도ㆍ오기선ㆍ오화영ㆍ신홍식ㆍ함태영ㆍ김세환ㆍ안세환ㆍ현순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결국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 결정키로 하고 이 문제를 함태영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 222, 최린에게서 독립운동 자금 5천원 원조받았다. 함태영과 함께 천도교측의 독립운동계획을 물어보자, 최린은 기독교측의 계획대로 독립선언을 하지 않고 독립청원서만 제출하려면 연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기독교측의 대표들과 모여 독립운동 계획의 방법을 숙의한 끝에, 천도교측의 주장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 224, 함태영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천도교측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동의하였다.
  • 227, 이필주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초안 회람, 함태영을 제외한 모두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 228, 가회동 선봉희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였다.
  • 독립선언 직후 일경에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였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1920
 
  •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복역중 조형균에게 학교 재건을 부탁, 조만식ㆍ유승모ㆍ박우병ㆍ장지영ㆍ백봉제ㆍ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207월에 오산학교가 개교되었다.
 
1921
 
  • 부인 이씨가 별세
 
1922
 
  • 722, 가출옥 석방되었다.
  • 용동에 자면회(自勉會)를 창립하고 사유재산 1천여평을 제공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3
 
  • 조선교육협회 간부로 활약, 민립대학 기성을 추진하였다.
 
1924
 
  •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5월부터 10월까지).
  • 장선경(張善慶)과 재혼하였다.
  • 회갑기념으로 61南岡을 출간하였다.
 
1925
 
  • 오산학교 재단법인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26
 
  • 오산학교를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켰다.
  • 신천(信川)농민학교에도 자주 나갔다.
 
1930
 
  • 53, 졸업생의 발기로 이승훈 동상이 건립되었다.
  • 58, 밤 협십증이 발병되었다.
  • 59, 새벽 4시에 별세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오산 성현동(城峴東)에 안장되었고 1931년 묘비가 건립되었으나 1942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1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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