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구연영(具然英, 1864-1907) - 정미의병, 독립운동가, 감리교 전도사

구연영(具然英, 1864-1907)

 
민승천 의진 중군장, 독립협회 회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ㆍ독립운동가, 감리교 전도사. 서울 출생. 호는 춘경(春景).
 

1864
 
  • 820일 구철조 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춘경, 본관은 능성이다.
 
1881
 
  • 18세 때 변미례와 결혼하였다.
  • 독립혈사에 그의 성품에 대해 천성이 관후인자(寬厚仁慈)하고, 활발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하여, 옳은 일이면 백절불굴하고 실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3
 
  • 첫째 아들 구정서 출생하다.
 
1884
 
  • 둘째 아들 구성서 출생하다.
  • 1884년 이후 정국이 더욱 어지러워지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1895
 
  • 12월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반일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김하락(1846-1896)ㆍ조성학ㆍ김태원ㆍ신용희 등과 함께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 양근(楊根)ㆍ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 백암 박은식이 동학농민전쟁에서 31만세운동까지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엮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구연영은 잠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정계의 부패를 볼 수 없어 퇴직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서 조국 광복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에도 구연영의 의병활동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그의 의병활동에 관한 사실은 일본의 군대가 남긴 <폭도일기>와 이천수의진의 대장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실려 있다.
 
1896
 
  • 117일 일본군 수비대가 쳐들어오자 1() 군씩 백현(魄峴)에 매복하였다가 광주 장항(獐項) 장터 부근까지 추격, 무기ㆍ군량 등을 노획하였다.
  • 213일 이현(梨峴)에서 적군 200여 명의 습격을 받아 역전하였으나, 부대는 병력의 열세와 혹한으로 흩어졌다.
  • 225일 다시 이현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의 연합의진이 재구성되자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 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 당하였다.
  •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ㆍ의성ㆍ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다.
 
1897
 
  • 18972월에 자진하여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 훗날 구연영과 사돈관계를 맺게 되는 원용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상동교회 스크랜톤을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인이 된 후 먼저 집안에서 양반, 상인의 신분적 구별을 철폐하는 등 혁신적인 행동을 취하였다고 한다.
  • 5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 명과 경기도로 진지를 옮겼다.
  •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또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 1875-1914)ㆍ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교육운동에도 종사하였다.
  • 1897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 사상을 토대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천에서 구국회(救國會)라는 이름의 애국단체를 결성하였다. 선생의 큰아들 구정서(具禎書)는 구국회의 조직과 실무를 맡아 선생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 그 후 그는 노곡리 집으로 내려가 자기 집을 예배처로 정하고 집 앞에 십자가를 달아 세워 놓고 예배드리면서 미신 타파와 도박 근절에 힘을 다하였다. 또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상인과 노복들에게도 존칭을 쓰는 등 당시 양반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집안에서 쫓겨났다.
 
1898
 
  • 셋째 아들 구완서 출생하다.
 
1899
 
  • 덕뜰에 정착해 살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새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1899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 정식으로 매서인이 되어 광주, 이천, 여주, 장호원 지역을 다니며 성서, 교리서를 팔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900
 
  • 그후 신학을 계속 연구하여 1900년 감리교 순회전도사로 임명을 받아 경기ㆍ충청ㆍ강원도 일부까지 순회하면서 전도하였고, 아울러 민중계몽과 국채보상운동도 벌였다.
 
1902
 
  • 넷째 아들 구종서 출생하다.
  • 1902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권사직분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권사는 평신도로서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로써 구연영의 교회 지도권은 확립되었다.
 
1905
 
  •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아홉 교회 교인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이천ㆍ광주ㆍ장호원ㆍ여주 지방을 순회하였고 자신의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메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을 병행하였으며 밤에는 구국회원들과 기도회를 열고 항일계획을 논의하였다. 구연영의 설교주제는 늘 항일과 일진회의 정체 폭로였으며 일본의 죄상 폭로였다. [구연영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추진위원회]
 
1907
 
  •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1907년 정미7조약이 발표되면서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각처에서 열었다. 대표적인 집회가 이천장터에서 열린 예수교인 대회였다. 19078월에 열린 이 대회에는 약 2천 명의 인원이 모여들었다 한다.
  • 이에 일진회에서는 경성 동편 10여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사라질 것이요, 배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다하면서 헌병대에 고발하였다. 당시 그의 전도집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일본인 한 사람이 찾아와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하나님 앞에서 믿음ㆍ소망ㆍ사랑을 품고 떳떳하게 살다가 떳떳하게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나라 없는 백성의 욕된 몸이 되어 벌레처럼 살아간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하며 피하지 않고, 계속 전도활동을 펴다가 그의 아들 정서(禎書)와 함께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 일진회는 구연영의 밑에서 일하던 이용주를 매수했다. 이용주의 밀고로 구연영은 맏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 일본 헌병은 갖은 악형을 다하여 같이 활동한 동지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였으나, 그는 일진회원 이외는 모두 나의 동지다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 1907716() 아들과 함께 현재의 이천 미곡시장 동편언덕 홰나무 앞으로 끌려가, 일본도로 팔과 다리를 짤리며 고문을 당한 후 총을 맞고 쓰러졌다.
  • 1907824일 일본군들은 악독한 고문을 하면서 구연영 부자의 팔과 다리를 일본도로 찌르고 그래도 조금도 굴하는 기색 없이 의연하게 견디자 이를 본 일본군은 마침내 총을 난사하여 부자(父子) 분이 함께 쓰러져 순국하고 말았으니 때는 순종 정미년(1907) 824(음력 716) 이었으며 선생의 향년은 44세요 아들 정서는 25세였다. 부자(父子)가 총살당하는 순간 줄곧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천둥 번개에다가 소낙비가 쏟아졌고, 그러자 사람들은 악독한 왜놈들이 의인을 죽여서 하나님도 노하신 것이라고 말들 했다고 한다. 具然英 부자를 살해한 일본국 수비대는 다음날 이포나루를 건너다가 분개한 의병들의 기습을 받아 섬멸되었다고 전해진다.(이천의 의병활동과 31운동, 53. 이천향토사연구회편)
 
1963
 
  •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애국정신을 높이 사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하였다.
  • 차남 성서(聖書, 감리교 목사), 4남 종서(鍾書, 감리교 목사)와 손자 장회(丈會, 성결교 목사)가 대를 잇고 있다.
 
2014
 
  •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구연영 선생을 2014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독립기념관(www.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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